한국희곡

김나정 '해뜨기 70분 전'

clint 2017. 2. 12. 14:46

 

 

 

배가 잔뜩 부른 만삭의 두 여자가 집이라는 한 공간 안에 자리해있다. 언뜻 보기엔 나란히 임신한, 터울이 큰 친자매 같기도 하다. 하지만 왠지 움직임이 수상쩍다. 혼자 앉는 것도 버거워하는 젊은 여자의 모습 뒤로 보이는 중년 여자는 부른 배에 비해 움직임이 그다지 불편해보이지 않는다. 친한 언니를 자처해 젊은 여자의 태교나 건강상태를 체크하는 모습이 흡사 친정 엄마 같기도 하다. 하지만 젊은 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을수록 중년 여자의 안색은 가면이라도 쓴 듯 위선적인 표정으로 바뀐다. 아래가 뻥 뚫린 무대 위로 돌아가는 회전무대는 두 여자의 갈등과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는 듯하다. 마지막,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아기의 울음소리는 또 다른 희망일까 새로운 절망일까.

 

 

 

 

 

싸움을 붙이고 싶었어요. 대리모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로 설정해서 열 달 동안 몸을 빌린다는 조건 하에 고용된, 갑과 을의 20대와 40대 두 여자의 관계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내고 싶었죠. 단순히 여자 대 여자의 싸움이 아닌, 세대 간의 갈등으로 확장시켜보고 싶었거든요. 막상 강단에 서보니 제가 선생님으로서 20대 학생들에게 얘기해줄 수 있는 게 지금의 힘든 것들이 다 추억이고 재산이라는, 정말 영양가 없는 대답밖에 할 게 없는 거예요. 20대가 보기에 40대는 극 속의 영서가 말하듯 가질 것 다 가진, 부족할 것 없는 세대로 충분히 비춰질 수 있으니까. 영서가 아이를 가져본 것도 재산이 되나요?’ 라고 반문하는 것처럼요. 비싼 등록금 때문에 돈을 벌다 죽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지금의 현실에서, 그리고 자신 역시 그 상황 속에 처한 상태에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은 병주가 쓰고 있는 가면 정도의 진실성 밖에는 지니지 않게 되는 거죠.”

하지만 병주 역시 영서와 같은 맨얼굴로 20대라는 청춘을 살아냈을 터였다. “남병주가 제거하려고 했던 건 결국 감정이었어요. 병주는 유산을 거듭하며 이건 죽은 살덩어리야라고 자기 자신을 세뇌시켰죠. 자기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불안하니까 자기를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깎아 낸 거죠. 그러면서 뭐 아무렇지도 않아 이런 건. 이라고 세뇌시킨 모습이 지금의 병주인 것이고. 가면 쓴 모습에 분개하는 영서에게 병주는 한 마디로 일축해요. ‘넌 가면 없이 맨 얼굴로 거지처럼 살아라고. 그러면서 덧붙이죠. 근데 니가 보인 맨얼굴을 걔가(상대방이) 기억이나 할 것 같냐면서. 결국 감정적으로 무뎌지지 않으면 살아내기 힘든 시점이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죠.”

그렇지만 끝까지 무뎌지지 않아야 할 부분은 있어야 한다고 그녀는 잘라 말했다. “가면 쓰고 무뎌지는 것까진 좋은데, 아이까지 내주고 얻는 게 대체 뭐냐고 영서가 말하죠. 처음엔 둘이 얘기라도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싸움을 붙였지만 마지막은 둘이 화해를 했는지 애를 누가 가져갔는지에 대해 저 역시 답을 내릴 수 없었어요.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영서가 엄마를 외치며 절규할 때, 병주는 영서를 품에 안은 채 도닥이며 순간 영서를 자신의 아기처럼 느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병주가 스스로를 아무도 찾지 않는 텅 빈 의자라고 얘기했을 때 그 순간만큼은 영서에게 진심이었으니까요. 다른 건 다 내줘도 끝까지 안 무뎌져야 되는 정도의 부분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거까지 내주면 사람이 아닌 지점까지 이르게 될 테니까.”

누가 나쁘다고 비난할 수 있음 속이라도 편할 텐데 어쩌다 엇갈린 거고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기에 병주도 영서도 모두 다 이해할 수 있었다는 작가의 말에 어느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녀는 단순히 고용인과 고용주의 관계였다면 결코 둘의 갈등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란 말끝에, 실상 이러한 진심을 토로할 수 있는 상대조차 현실 속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쓸쓸히 덧붙였다그렇다면 이 둘의 갈등은 어쩌면 화해라는 첫 여정에 막 올라선 것은 아닐까. 갈등으로 표출해낸 서로의 진심은 아이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데까지 성공케 했다. 희망이든 절망이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작가의 말처럼 결코 무뎌질 수 없는 그 무언가의 끈을 단단히 쥐고 있는 까닭이다. 아이에게, 그리고 이 아이를 출산해낸 작가에게 다시금 화해라는 새로운 과제가 생긴 셈이다. 공연 내내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공연을 봤다는 작가의 노고에 심심한 박수를 보낸다.

 

 

 

 

 

2인극 <해뜨기 70분 전>은 어느 원룸 안에서 벌어지는 임신한 두 여자에 대한 이야기로 인간적 유대감 없이 형성되는 그들만의 특별한 관계와 거래를 통해 현대 사회의 어두운 현실과 그에 따라 메말라가는 감정을 보여준다. 물질과 조건이 인간보다 앞서는 현대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두 여자의 특별한 이야기이다.

삶에서의 가장 큰 행복과 축복 중 하나인 임신과 출산에 대한 상황, 여자들과의 따뜻한 유대감과 감성의 교류가 있을 법한 상황이 이 둘에게는 조건과 돈이 개입되어 자기 자신의 필요조건에 따라 움직이고 선택하는 이들을 통해 이 사회의 각박함과 함께 우리 모습에 내재된 자기중심적 모습과 집착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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