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이상한 기차>는 일상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하며 꿈을 잃고 사는 현대인을 위한 우화 스타일의 연극이다 김재엽은 데뷔작〈페르소나〉, 〈맨버거, 그 속엔 누가 들어 있나?〉, 〈유령을 기다리며>,<오늘의 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등에서 현실과 환상을 뒤섞거나 메타극적 방법, 혹은 극사실적 문법으로 연극하는 행위나 권력, 혹은 사회적 일상에 대해 나름의 독특한 연극 만들기를 보여 왔다 최근에 이르면서 그의 연극 만들기에는 재치 있는 말장난과 반복, 어깃장, 말 비틀기로 희극성을 자아내는, 이른 바 '김재엽 식 유머'가 특징적으로 보인다.<유령을 기다리며〉는 그 유명한 고전<햄릿>과<고도를 기다리며>의 연극 상황과 캐릭터를 가져와서는 원전의 의미를 무의미와 연극놀이로 불경하게 비틀어버린 극이다. 햄릿은 아버지 유령을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잠을 자거나 딴 짓만 하고, 유령은 햄릿을 만나기 위해 나타나지만 햄릿이나 다른 인물들은 아무도 유령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원전의 엄숙한 권위는 이 젊은 작가에 의해 발칙한 연극놀이로 격하되고 맘껏 패러디된다. 그리고 그 발칙한 상상력과 유머, 패러디의 종횡무진 연극놀이가 이 연극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2005년에 초연된<아주 이상한 기차>는 발칙한 상상력에 기대었다기보다는,'어른을 위한 우화' 스타일의 경쾌하고 '착한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적당량의 재미와 교훈이 버무려져 있으며 관객에게 불안이나 모호함도 안겨주는 일 없이 현실로 안전하게 착지시킨다.
극은 늦은 밤 마지막 전철을 타본 사람들에겐 매우 낯익은 풍경으로 시작한다. 술에 취한 회사원의 주정, 그 주정에 시달리며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다른 승객들…… 그런 낯익은 풍경으로 시작하여 작가는 '아주 이상한 기차 여행'이란 판타지를 제시한다. 우리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류의 이러한 서사 전략에 대해서는 많이 익숙하다 그러므로 작가가 고민한 것은 이 판타지를 어떻게 기발하게, 재미있게 펼쳐가면서 우리 현실의 은유로 그려내어 철학적 의미를 암시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을 것이다.
보험회사 직원인 '얼떨한 여행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안전선 밖으로 뛰어내리려는 호기를 부리기도 하고 전철에 타서는 다른 승객들에게 집적거리며 온갖 추태를 부린다. 같이 탄 승객들은 우울한 여 로커, 초월한 노숙자, 순진한 대학생, 날라리 여고생 등이 다 다음날 아침, 잠이 깬 그는 지하철 역 바닥의 노란선 바깥에 잠들어 있었음을 발견한다. 이상한 승무원은 안전선을 지키지 않고 위험한 행동을 한 그를 나무라며 이상한 기차에 태운다. 이 도입부를 지나 극은 주인공이 각각 이상한 인물들을 만나면서 겪는 '이상한 기차여행'이라는 판타지를 다룬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얼떨한 여행자가 외로운 여행자를 만나는 내용이다. 외로운 여행자는 자신의 짝사랑을 얘기해주며 음악을 함께 듣는다.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얼떨한 여행자는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살았던 자신의 외로움을 돌이켜 보게 된다. 비로소 그는 일상에 매몰되어 잊고 살았던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감정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는 출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외로운 여행자처럼 "제 마음이 닿는 곳”까지 가볼 생각을 한다. 예전에는 친구들도 많았고 문학 동아리에서 시도 썼던 낭만과 열정과 사랑이 있었던 과거를 반추하면서, 그러나 그가 머뭇대는 사이 외로운 여행자는 내리고 만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간섭꾼 여행자와 호사가 여행자와의 만남을 그린다. 두 사람은 똑같은 모자와 가방, 검은 양복의 회사원 차림으로 허겁지겁 달려 들어와 얼떨한 여행자의 자리가 자기 자리라며 자리 뺏기를 반복하고 모자와 가방을 바꿔치기한다. 이 두 명은 얼떨한 여행자의 젊은 시절과 나이든 시절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호사가는 보험회사에 갓 입사한 인물로 늘 현재의 순간을 충실히 살아야 하며 오늘 하루는 내일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간섭꾼은 회사에 매이는 것은 의미가 없다며 지금 이 순간의 자유를 만끽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난 나중에 늙어서 편하게 살려고 매일 젊은 날들을 허비하고 있었어.” 간섭꾼은 얼떨한 여행자에게 사직서를 내밀며 자유롭게 살라고 채근하고 호사가는 아무리 떠나봐야 인생은 결국 지금 이 자리라며 사직서를 찢어버리는 행위를 반복한다. 주인공의 두 분신들인 간섭꾼과 호사가의 상반된 주장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내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다 젊은 분신은 내일을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 명령하고 늙은 분신은 목표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조언한다. 젊은 분신은 인생은 기차처럼 목적지와 정확한 코스가 있다고 주장하고 늙은 분신은 삶이란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로 이루어진 것임을 말한다. 이 에피소드는 분신들을 등장시켜 기차와 인생의 유비를 통해 철학적 의미를 제시한다. 자칫 관념적인 설교로 떨어질 수 있는 내용을, 한 쌍의 인물이 벌이는 소동, 떠들썩한 자리다툼, 모자나 가방 등 소품 바꿔치기, 기차에서 뛰어내리기 둥의 희극적 행위로 떠받쳐 재치 있게 표현해낸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가면 쓴 여행자와의 만남을 그린다. 노래를 부르며 뮤지컬의 한 장면을 연습하던 가면 쓴 여행지는 울기 시작한다. 새마을금고를 다니다가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해 직장을 그만 두고 뮤지컬 연습에 매진했으나 재능이 없다는 타박을 듣고 꿈을 포기해야 할 기로에 서있다는 것이다 얼떨한 여행자는 누구나 의지와 노력만으로 안 되는 때도 있지만 그 고통을 견디고 열심히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며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준다. 이 에피소드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직장을 버리는 용기와 열정을 가졌으나 인정받지 못하는 재능으로 인한 좌절의 문제를 다룬다. 앞의 두 에피소드에서 얼떨한 여행자가 조금씩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자신의 결핍과 생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면, 이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진 주인공을 제시한다. 네 번째 에피소드는 안자는 여행자와의 만남을 그린다. 안자는 여행자는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기차여행을 즐기게 된 얼떨한 여행자의 잠을 깨운다. 그녀는 지금 탈출하지 않으면 모든 걸 잊어버리게 된다고 말하며, 풍선을 머리에 매어 달고 날개 삼아 기차에서 사라진다. 얼떨한 여행자도 이상한 승무원이 준 풍선을 달고 날아가려 하나 이상한 승무원이 터트려버린다. 앞의 세 개의 에피소드가 주인공의 점진적인 내적 성숙이나 성찰을 암시하고 있었다면, 이 에피소드는 주인공의 자아를 찾기위한 여행이라는 주제와 긴밀한 관련성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는 이 기차여행이 결국 영원한 망각 - 죽음으로 가는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인생과 기차여행의 동일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이 네 개의 에피소드로 연결된 판타지가 끝나고 이어지는 장면은 얼떨한 여행자가 "나도 내리고 싶어!”라고 잠꼬대하면서 초월한 노숙자 옆에서 깨어나는 순간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의 '이상한 기차 여행'은 주인공의 꿈이었던 것이다. 초월한 노숙자는 그에게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하며, 현실이 암담하더라도 삶 속에서 작은 희망을 찾아내어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꿈에서 깨어난 여행자는 마치 관객에게 들려주는 작가의 메시지 같은 설교를 듣는 것이다 주인공이 만나는 독특한 여행자들, 멋지게 연기되고 유머가 결부된 그들의 사연을 들으며 판타지에 젖었다가 이 진부한 현실로 돌아온 결말에서, 마치 수많은 실용서적에서 맞닥뜨릴 만한 '삶의 지혜'를 들을 때 연극적 환상에서 화들짝 깨어나 맥이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가 늘 타고 다니는 익숙한 지하철을 비일상의 판타지 공간으로 바꾸어 인생의 의미를 기차여행에 비유한 철학적 우화를 꾸며낸 작가의 상상력은 신선했다. 이 극은 무거운 주제의식을 깔고 진지하게 인생의 의미를 사유 하거나, 비주류 연극의 불길한 상상력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주려는 극은 아니다. 이 극은 가볍고 경쾌한 희극적 터치로 일상에 매몰된 삶을 스케치한다. 우리가 망각하거나 혹은 외면하고 있는 내면의 목소리나 욕구를 꿈 - 판타지의 형식으로 직면해보게 하는 걸 연극적 목표로 삼아 매우 재치 있고 예쁘게 만든 극이다. 그러나 이상한 기차여행을 꿈으로 뒤집고 마는 관습적 방식, 그리하여 사실적인 문법에 얽매인 폐쇄구조로 만들어 버렸기에 이 극이 촉발할 수 있는 사유와 의미망이 제한되고 말았다 어차피 연극은 꿈의 놀이인데, 얼떨한 여행자가 동화에서처럼 현실로 안전하게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굳이 초월한 노숙자를 설정하여 인생의 교훈을 던져줄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다면 주인공이 내면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결핍과 욕구를 깨닫게 된 여정은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일까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를 교란하는 좀 더 과감한 상상력, 견고한 일상의 습관에 불안이나 악몽의 흔적을 남기는 어두운 그림자의 과감한 터치가 좀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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