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사니" 라는 제목의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수 없이 받았는데 "거위" 의 평안도 방언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우연치 않게 "게사니" 공연의 스탭들 가운데는 용케 평양출신이 한자리에 모인 꼴이 되어 단내에 화제가 되었다. 작가인 이근삼씨를 비롯하여 분장을 맡은 전예출씨, 무대장치를 맡은 최연호씨, 의상을 맡은 최보경씨가 모두 평양출신. 이러고 보니 연기자들이 오히려 전전긍긍할 판. 스탭들 보다 대사 감각이 뒤질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 지지 않으려고 온갖 인척관계를 수소문하고 평안도민회를 찾아다니며, 연습 초반은 마치 외국어 강습 받듯이 사투리 학습에 열을 올렸다. 그런데 평양부인회에서 만난 한 부인이 우연히도 이근삼씨의 국민학교 동창으로 밝혀져 공연 때에는 이산동창 재회장면이 연출될 예정으로 있다. 아무리 고향말이라도 주로 현대어로 풍자희극을 써온 이근삼씨의 사실적인 방언구사가 매우 정교한 것으로 판명되어 역시 극작가의 감각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고 이구동성 말한다
게사니" 공연을 충실하게 감상하려면 필히 국어대사전을 지참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북 사람마저 간간히 모르는 평안도 방언이 쏟아져 나오는 데다가 궁중의 왕과 대신들의 말은 어려운 한자어로 점철되어 있어 배우들은 과연 대사의 몇 프로가 전달 될 수 있을 것인지 걱정들이 태산 같다. 프로그램에 낱말풀이를 실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을 정도인데 왕과 대신들의 말은 거의 사서에 번역되어 있는 말들을 인용한 것이나 다름 없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전달에 문제가 있을 법하다. 거친 평안도 사투리와 유식한 궁중언어가 교차하는 이 연극을 보는 동안 관객들은 약간은 한국어 실력에 대한 비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동시통역을 사용하자는 강경론도 대두할 법하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구가 한성을 함락하고 평양성으로 물밀듯이 밀려온다. 종묘사직을 팽개치고 평양성마저 포기하고 겁에 질려 달아나는 왕과 조정 대신들. 가진 것 있는 백성들까지 피란을 간다고 난리법석이다. 그러나 더이상 빼앗길 것 없는 가난한 이들은 이 전쟁에 초연하다. 가진 것 없는 그들은 왜적이 오든, 명나라 군대가 오든, 아니면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든, 별다를 것이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사니'(이근삼 원작)는 이런 가난한 민초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제목 '게사니'는 거위를 가리키는 평안도 사투리. 평양성 밖 초라한 주막집 여주인의 별명이기도 하다. 이 연극의 주인공인 '게사니'는 손바닥만한 주막을 꾸려가며 억척스럽게 가족들을 부양한다. 남편과 큰아들은 병정으로 뽑혀 나가있고 작은 아들 장대와 두 딸 보름·탄실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게사니 일가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이다.왜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에도 초연하게 주막을 지키고 있던 '게사니' 일가에게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다. 백성들 몰래 평양성을 빠져나가던 왕 일행이 군중들에 발각되고, 노한 군중들이 돌팔매를 하며 밀려가는 와중에 아들 장대가 휩쓸려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이어 밀려드는 왜군들에 대항하던 '게사니'가 죽음 직전에서 겨우 목숨만 건지고 그 와중에 큰딸 보름이가 왜병들에게 짓밟히는 시련이 이어진다.
작가는 게사니 일가에 이처럼 임진왜란이라는 커다란 사건을 덮어씌우면서 권력의 허구성과 민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속속들이 그려낸다. 권력을 쥔 왕과 조정대신들이 제 목숨 보전하기에 급급해 백성들을 버리고 줄행랑을 치는 사이, 권력이나 나라와는 무관하게 보이던 가난한 민초들은 왜란의 고통을 고스란히 떠안는 모습은 이땅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보여준다. 또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 아픈 삶을 이어가는 '게사니'의 모습을 통해 민초들의 삶이 얼마나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지를 관객들에게 전해주기도 한다. 이근삼의 작품다움이 배어있는 이 한 편의 연극은 비록 배경이 임진왜란때의 평양성이지만 시간의 경계를 건너뛰어 평범함, 그리고 평화로움의 중요성과 보편성을 현대에까지 접목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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