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감옥에서 인간은 왜 죄인인가. 인간의 희극적인 행동을 보면 우리는 해학을 느낀다. 좀스럽고 거만하거나 우둔한 인간의 약점을 보고 느끼는 쾌감은 비정한 쾌감이다. 현대인의 생활에 세련된 풍자미학으로 예리한 메스를 가하여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파헤친 이근삼 작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는 그의 강력한 현실폭로의 윤리가 우회적으로 표출된다. 대사의 세련미, 생동감 넘치는 박력, 역설적인 풍자를 통하여 템포감있게 객석에 전달되는 능변이 있다. 얼핏 보기에는 희극적인 것 같지만 그 안에 심각하게 투영된 현실의 그림자, 죽음이란 운명에 처한 인생의 짙은 비극성이 있다. 극중 인물의 모순된 행동을 통하여 비참한 현실에 대한 분노의 고발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소와 자학과 요설을 더 즐겨 퍼부음으로써 그는 역설적 수법을 완성하여 새로운 차원의 풍자극을 표현하고 있다.
2천년 전의 왕국. 모든 백성의 충성심과 권력과 부와 명예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대왕에게 죽음의 사자가 방문하고 죽음의 메시지를 전한다. 대왕은 자신을 위해 대신 죽어줄 사람을 찾지만, 선왕도, 왕비도, 총리도, 성문 밖의 거지조차도 대왕 대신 죽기를 거부한다. 25살의 나이에 기저귀를 차고 동요를 부르는 왕자는 대왕의 권력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대왕은 스스로 죽음을 결심하게 되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대왕만세'라는 환호성을 들으며 죽음을 맞는다. 대왕의 죽음은 권력의 허상과 생명의 존엄성을 상기시킨다
이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자 한국 희곡계는 그 물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4·19 직후에 장기 집권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은 하나같이 신물을 내는데, 대왕만이 그 사실을 유일하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대왕에게 나이 사십이 넘은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나이가 든다는 것을 대왕은 인정을 안했습니다. 아들이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의 성인이 되었다고 하면, 왕권을 넘겨줘야 하기 때문에 늘 어린애처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늘 기저귀를 차고 다니게 했습니다. 마흔 살 먹은 사람이 기저귀를 차고 등장을 하니, 관객들은 얼마나 자지러졌겠습니까. 그 당시는 사실주의 연극들만이 무대에 올려질 때입니다. 사실주의만이 유일한 예술의 형식이라들 믿고 있을 때, 마흔 살 먹은 배우가 기저귀를 차고 무대에 나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또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에서는 사실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저승사자가 나와서 이제 대왕이 죽을 때가 됐다고 말해 줍니다. 그러자 대왕은 저승사자더러 "나 대신 죽겠다는 사람을 찾아서 데려오면 안 죽게 해줄 수 있느냐?" 묻죠. 저승사자의 그러겠다는 대답에 대왕은 너무 뛸 듯이 기뻐합니다. 자기가 부탁을 하면 누구든지 들어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더러 "나 대신 죽어줄 수 있느냐."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을 뿐 아니라, 누구를 붙들고 부탁해도 아무도 안 들어줍니다.
그러자 대왕은 저승사자 앞에서 죽기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인즉 대신 죽을 사람을 못 구해서 죽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리 죽음을 못 구해 안 죽겠다고 거부하는 게 얼마나 억지이고 우스운지 모릅니다. 마치 자유당 말기에서 4·19에 이르는 이기붕 부통령, 이승만은 대통령의 구린내나는 관계를 연상시키는 정치적 풍자극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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