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근삼 '국물 있사옵니다'

clint 2016. 10. 18. 20:17

 

 

 

1966년에 양광남(梁廣南) 연출로 민중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이근삼 특유의 위트를 살려 현실적 가치질서를 전도시켜 현대 한국 사회가 지니고 있는 허점을 풍자한 소극(笑劇)이다. 작자는 이 극에서 독특한 화술(話術)과 간략한 무대장치의 교묘한 활용 및 주인공의 다각적 이용(해설자, 사건의 주도자, 도구 운반자 등)으로 빠른 템포를 유지, 세태 풍자극이 빠지기 쉬운 매너리즘에서 구출해 주고 있다. 주인공 김상범은 평범한 사회인으로서 정직하고 상식적으로 살아오는 동안 늘 실패와 손해만 보아왔다. 그러다 우연히 휴지 한 장이 계기가 되어 사장의 눈에 들게 되자, 세상에는 출세(出世)의 지름길이 있음을 깨닫고 과감히 행동을 개시한다. 먼저 상사인 경리과장이 회사돈을 유용한다고 모함하여 성공,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사장의 며느리이며 비서인 성아미와 박전무와의 스캔들을 이용, 임신중인 그녀와 결혼한다. 암흑가의 건달과 타협, 그에게 강도질을 하게 하고 뒤에서 총을 쏘아 회사에 큰 공로를 세운다. 드디어 그는 상무가 되고 사장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못하다. 대학교수를 집어치우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 형과 밤잠도 거의 자지 않고 공부해서 입사시험에 합격한 동생은 오히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데……왜 그럴까? 작자는 김상범의 어처구니 없는 희극 속에서(작가는 그것이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인의 비애(悲哀)를 보여주고 싶어했던 것이다.

 

 

 

柳致眞으로부터 비롯된 궁상맞고 꾀죄죄하고 한숨과 탄식소리만 들리는 사이비 리얼리즘 계열의 창작극에만 익숙해온 나에게 <국물 있사옵니다>는 매우 신선한 체험을 안겨 주었으며 우리 창작극에 대한 한가닥 서광을 던져준 것처럼 느꼈다. 그 후 연극을 전공하게 되고 우리 演劇史에 대하여도 약간의 지식이 축적된 후에 난 이 작품이 우리 劇文學史에 있어서 매우 각별한 意義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될 수 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 의의가 무엇인지를 하나씩 꼽아보기로 하겠다. 첫째, 이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희귀한 喜劇作品의 본격적인 탄생을 가져다 준 작품이다. 과거 新劇史를 돌아볼 때 喜劇작품은 눈씻고 찾아보기 힘들 만큼 드물다. 우리 민족이 해학과 익살에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희곡문학에 있어서 희극정신은 찾아보기 어렵다. 유치진의 희곡에 간간히 희극적 대사들이 눈에 띄긴 하나 全他의 작가들에게 있어서 휴먼센스는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희곡뿐 아니라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거의 유일하게 해학적 소설가로 알려진 채만식도 희곡에 손을 대면 당장 암울해진다. 60年代 이전의 新劇史에서 희극작가를 꼽을 수 있다면 유일하게 吳泳鎭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맹진사댁 경사>를 포함하여 두 편 정도가 고작이 아닌가 싶지만. 비교적 多作이랄 수 있는 이근삼 선생의 경우는 初期作<욕망>과 史劇<게사니>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喜劇의 범주에 드는 작품만을 썼다. 그 본격적 출발이 바로<국물 있사옵니다>인 것이다. 그런데 이근삼선생 이후에도 지금 이 시간까지 우리나라에 희극 작가는 태어나지 않고 있다. 유일하게 박조열이 있기는 하나 불행히도 작품이<토끼와 포수>한 편 밖에 없다. 자, 이만하면 이근삼선생이 얼마나 國寶的인 존재인지 충분히 입증되었을 줄 믿는다.

 

 

 

 

 

그런데 <국물 있사옵니다>, 이 작품이 가지는 두 번째 의의는 한층 더 심대하다. 이 부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다. 흔히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 연극을 '한국 現代 연극'이라고 말들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現代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의 現代연극이 과연 언제 시작되었는지, 아니, 우리에게 현대연극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도 거의 없다. 막연히 습관적으로 20세기의 연극을 현대연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21세기가 가까운 지금도 지구상 어느 곳에는 결코 현대연극이라고 부를 수 없는 연극들이 무수히 공연되고 이싿. 자, 이 논의를 이 지면에서 더 이상 길게 끌 수는 없다. 나의 잠정적 결론은 이것이다. 만일 우리에게 현대연극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시발점은 바로<국물 있사옵니다>가 될 공산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현대의 의미를 절대적 가치 질서의 상실로부터 파악한다고 했을 때 우리나라 희곡에서 그같은 인식의 기미를 거의 최초로 드러내 보인 것이 바로<국물 있사옵니다>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유치진류의 한국 리얼리즘 계열의 희곡들은 한결같이 unhappy ending으로 끝난다. 이것이 마치 현대의 회의주의와 맞닿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해다. 비록 각박한 현실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결말은 unhappy하게 끝나지만 작가의 마음속에는 도덕적 낙관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비록 주인공은 불운을 당해도 天上의 神은 존재하며 善과 正義는 살아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국물 있사옵니다>는 喜劇답게 happy ending으로 끝난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거머쥐고 勝者로 군림하지만, 과연 그가 진정한 승리자일까 의문부호가 찍힌다. 이근삼선생의 작품은 항상 이같은 불투명하고 불유쾌한 happy ending, 곧 회의로 끝난다. 다만 그의 회의 또는 씨니씨즘이 어느만큼 형이상학적 인식에 토대를 둔 것이지에 대해서는 회의가 없지 않지만, 이제<국물 있사옵니다>의 마지막 意義를 말할 차례이다. 이 작품은 우리 희곡사에서 종전의 리얼리즘의 틀을 깨고 극의 양식면에서 劇場主義라는 새로운 수법을 최초로 무대에 도입한 작품으로 꼽힌다. 물론 이것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이근삼선생의 외국 유학의 덕택일 것이며, 특히<민중극단>의 창단 공연인 프랑스 희극<달걀>의 模作이 아닌가 하는 심증이 상당 부분 있기는 하나 새로운 수법을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해 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다만 이 작품의 극장주의는 도덕적 상대주의 철학에서 샘솟은 피란델로풍의 극장주의라기 보다는 세련된 연극적 재치의 産物인 프랑스풍의 극장주의에 머물기는 했다.

 

 

 

 

 

 

 

이상 설명한 <국물 있사옵니다>의 세 가지 意義의 측면들은 따지고 보면 서로 유기적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이들 모두 우리 新劇의 말만 '新劇'이지 전혀 새롭지 않은 舊習들을 깨트려 주는데 기여한 부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의의가 돈독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대한 불만이 없지는 않다. 1975년엔가 내가<민중극단>에서 다시 이 작품을 연출하면서 改作을 통해 그 불만의 일단을 해소하려 했던 경험이 있다. 나는 우선 제목부터<수렵사회>라고 고쳤다. 사실<국물 있사옵니다>는 初演 당시의 유행어를 갖다붙인 억지 제목이다. 내용과도 별 관계가 없는 이 제목은 당시 출연자들끼리 의논해서 붙였다고 한다. 이같은 제목에 있어서의 비논리성은 내용에서도 군데군데 드러난다. 희극이라는 전제하에서도 개연성과 신빙성이 부족한 인물의 설정과 사건의 전개가 도처에 드러나는 것이 가장 큰 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위에 든 세가지 의의만으로도 우리 희곡사에서 거듭 재론, 재평가되어야 할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오늘 저녁의 공연이 그런 뜻에서 한 몫을 해 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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