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선 섬뜩하리 만치 다정다감한 이웃사촌의 이야기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 죽음을 배제한 삶에서 인간의 물질적 탐욕이 도를 지나쳐 살인에 이르는 요즘 사람들의 이야기. 참혹하게 살해된 할머니의 죽음과 사라진 백만원의 용의자로 지목된 이웃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은 죽음 앞에 선 이웃들의 물질적 욕망을 결코 무겁거나 어둡지 않게, 우습고 정겹게, 하지만 간담이 서늘하게 보여준다. 사실적 소재에서 웃음과 재치로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김광보의 방식이다. 연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바다로 가득하지만 극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가슴은 온통 뜨거워질 것이다. 평생 외롭고 고단한 삶을 살았던 강옥자 할머니는 자신의 장례비용 백만 원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이웃들에게 자신의 장례를 부탁한다. 한 소년이 찾아와 장례보다 탑을 쌓아야 한다고 종용하는 꿈을 꾼 할머니는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여기며, 서서히 죽음을 준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잔인하게 살해된 채 자신의 집에서 발견된다. 경찰은 누군가 할머니 장례비 백만원을 노리고 저지른 사건으로 보고, 할머니의 이웃들을 상해로 취조한다. 그 중 택시운전사인 한기물이 첫 번째 대상이 된다. 그는 할머니에게는 아들처럼 친근한 사람이었지만, 사실 다른 사람의 목숨쯤은 가볍게 여기는 흉악범 전과자다. 이후, 혼자 살면서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정말자가 취조 대상이 된다. 정말자는 할머니와 가족처럼 지내는 가까운 사이지만, 종말교를 신봉하는 교회의 열성 신도로 평소 할머니의 백만원을 교회에 바치고 싶어 했다. 다음 용의자는 동네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는 탁기봉 영감이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정력을 자랑하는 그는 평생 색시장사를 하던 포주였고, 최근 만난 여자의 빚을 갚으려 백만 원을 급히 필요로 했다는 것이 밝혀진다. 다음은, 십대 동거부부 미나와 진이었다. 진은 몇 차례 할머니의 돈을 훔친 전력이 있었다. 그즈음, 할머니는 죽음의 초행길을 걷고 있다. 그곳은 소년이 죽은 자를 위해 탑을 쌓아주는 길이기도 하다. 소년을 다시 만난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 탑을 쌓아 줄 것을 부탁하지만, 그제야 자신의 장례비 백만 원이 사라진 사실을 깨닫는다. 한편, 서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용의자들은 서로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경찰서 유치장에 모인 용의자들은 미나의 꿈속에서 장례를 치러달라고 애원하는 할머니의 얘기를 듣고, 두려워한다. 그리고 갑작스런 미나의 추궁으로 그날 밤의 비밀이 벗겨진다. 숨겨져 있던 범행동기! 범인은 누구인가! 풀리는 듯하면서 꼬여버리는 범행일지가 펼쳐진다.
<작가의도>
인간존재에게 있어 죽음이란 생의 처음부터 시작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대부분 생의 끝에서야 만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터부시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혹은 무관심하기도 합니다. 생명이 아름다운 이유는 태어나고 죽는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없는 삶은 마른 장작처럼 가볍고, 모래알처럼 손에 담을 수 없는 공허한 것입니다. 죽음과 공유하는 삶은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의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비해서 장례비 백만원을 쥐고 사는 한 노인의 삶과 죽음을 통해,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할머니 이웃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 없는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 봅니다. 갓난아기의 탄생은 어떤 힘겨운 상황에서도 기쁨을 줍니다. 그렇다면 아이가 자라 세상에서 살다가 언젠가 맞게 되는 죽음은 지난 생에 대한 위로와 안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과 분리된 죽음. 철저히 죽음뿐인 죽음이며, 또한 죽음이 잊혀진 삶일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라는 생각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수명이 정해있는 공산품으로 전락시키는 잔인한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순탄하지는 않은 삶이라면 죽음에 대해서는 한 번쯤 아주 편안한 상상을 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우리에겐 필요할 겁니다. 언제, 어디서든 우리가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라면 어떤 생각으로 기다리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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