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수미 '레몬'

clint 2016. 4. 24. 10:37

 

 

 

 

레몬은 귤 같다. 그러나 레몬과 귤은 다르다. 귤은 알맹이를 먹고 껍질은 대부분 버린다. 반면에 레몬은 껍질이나 과즙을 이용해 향료나 식품을 만든다. 귤은 손에 들고 금방 먹을 수 있지만 레몬은 향기에 끌려 냉큼 잡아도 그대로는 먹을 수 없다. 물론 억지로 먹는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그러려면 신맛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수미 작, <레몬>은 결혼에 관한 작품이다. 작품에 레몬은 나오지 않는다. 레몬은 결혼을 축약한 상징일 것이다. 그래서 질문하게 된다. 레몬? 레몬이라? 무슨 뜻이지? 그러나 이거다 하며 딱 부러지게 내놓는 정답은 없다. 결국 관객들 스스로 레몬이 뭔지 고민하게 된다. 아마도 극이 끝나고 돌아가면서 관객들은 모두 스스로의 레몬을 규정하거나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결혼이라는 제도와 인간은 과연 어떤 관계일까? 종의 보존이나 번식을 위해서라면 굳이 결혼이 아니어도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과연 그게 무엇일까? <레몬>은 그것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정신적인 차원의 답으로 사랑도 제시해 보고 육체적인 차원의 섹스도 대입해 본다. 그래서 사랑으로 만났다 섹스 때문에 헤어진다는 설정이 등장한다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단순구조에 머물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쉬운 구조라면 세상만사 복잡할 게 없을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그렇게 단순한 요소로 세상의 모든 일은 설명해냄으로써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고 심지어 노벨상을 받기도 하지만, 적어도 김수미의 <레몬>은 그런 방향을 택하지는 않았다. 마지막 만찬을 위해 마주 앉은 두 사람이 남기는 미확정의 여운은 바로 그 간단치만은 않은 인간사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사랑을 해서 결혼을 했지만 두 사람이 앞뒤좌우 딱 맞아떨어지게 조화를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삐걱거린다. 그러다 부부는 각자 탈선하고 그 골이 깊어져 결국 헤어지는 길로 가게 된다. 그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고자 연극은 그 탈선의 현장을 제법 적나라하게 형상화한다. 그렇게 극단까지 갔으니 둘 사이 회복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렇게 이별에 합의했으나 부부는 습관적으로 식탁에 마주앉는다.

 

 

 

 

 

연극 <레몬>은 결혼을 한지 얼마 안 된 젊은 부부의 사랑의 위기를 경제적, 사회적인 외적 요인과 불임이라는 내적 요인, 그리고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부족에서 오는 정신적 요인 등이 부부간의 육체적 접촉 단절과 가정파탄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연극이다무대는 배경 막에 통로를 만들어 휘장을 드리우고, 영상을 투사해 장면변화에 대처한다. 무대 좌우에 등퇴장 로가 있고, 배경 막 오른쪽에 책이 잔뜩 꽂힌 책장이 보이고, 무대 상수 쪽에는 식탁과 의자가 놓여있다. 무대중앙에는 가리개 같은 커다란 철망 두 개가 있어 장면변화에 맞춰 이동 배치시킨다. 철망에는 붉은 칠을 한 의자 세 개가 비스듬히 매달려 있고, 가구 디자인을 한 용지를 잔뜩 붙여놓았다. 붉은 색의 의자를 무대 여기저기에 포개놓은 게 보인다. 장면변화에 따라 소파를 들여다 놓기도 한다.

 

 

 

 

 

연극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밤새 가구 디자인을 하는 남편의 작업실에, 부인이 남편의 내복을 가져다주려고 등장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작업실에서는 성 접촉의 교성이 들리고, 남편의 정사장면이 부인의 시야에 들어온다. 실내등을 켜고 남편은 부인이 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불륜장면을 들킨 사람답지 않게 태연자약하다. 상대여인도 마찬가지다. 부인은 두 사람이 남편의 대학 선후배 사이임을 아는 눈치다. 남편의 뻔뻔한 모습에 부인은 남편의 따귀를 때리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온다. 그러자 남편은 휴대전화로 누구에겐지 통화를 한다. “성공했다라고. 향후 연극은 남편이 어째서 불륜현장을 아내에게 보이려고 했는지 시간을 거슬려 올라간다부부는 남편의 가구디자인을 이유로 아파트를 처분하고 주택으로 이사를 하는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부인의 어머니가 새집으로 찾아오고, 부인의 아버지 역시 찾아온다. 그런데 부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한 사이라, 서로 마주치기를 꺼려한다. 근자에 늘어나고 있는 황혼이혼 사례를 이 연극에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부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하는 남편의 모습이 어정쩡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일까?

경제 불황이 가구업계는 물론 가구디자이너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 가구디자인을 하는 남편이 경제적인 문제로 육체까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겪어 본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다.

고개를 숙인 채 부인에게 다가간다는 것은 무리다. 그러니 남편은 대책을 강구한다. 다른 여인에게서 자극을 받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남편이 만난 여인이 대학후배와 현재는 포르노 관련업체에 종사하는 첫사랑의 여인이다.

새집으로 이사를 한 부인은 우연히 여인의 나신을 촬영한 사진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 촬영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부인은 그 사진작품을 책갈피에 끼워 보관한다. 어느 날 한 남성이 부인이 혼자 있는 이 집을 찾아온다. 그 남성은 이 주택에 먼저 살던 사람이라며, 무엇인가를 찾을 게 있어 왔노라고 부인에게 설명한다. 부인은 그 사진을 내어보인다. 남성은 활짝 웃으며 고마워한다. 사진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며 부인과 남성은 상대에게 한 걸음 다가가게 된다. 향후 부인은 자신의 나신을 남성에게 촬영하도록 하게끔 두 사람의 사이는 밀착된다부부는 각자 다른 이성과 정분을 나누는 것으로 극적 설정이 된다남편이 부인의 나신을 찍은 사진을 발견하게 되고, 부인의 외도를 눈치 채게 된다. 이로 인해 결국 두 사람은 이혼을 염두에 두게 된다부인의 부모가 위기의 부부에게 찾아온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해와 배려로 남편을 감싸라고 권한다. 어머니는 이혼 후에 고독하게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딸에게 충고처럼 보여준다대단원에서 파경직전까지 간 부부의 식탁장면은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반전으로 연극은 마무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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