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영선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

clint 2016. 4. 18. 19:53

 

 

 

 

 

작가 서문

 

지식인이 가진 특권 중에서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는 그가 그 시대의 기록자로 - 그의 주 임무가 역사를 기술하는 것임을 스스로 또한 사회의 체계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역사학자라고 부르는 자들만이 아니라 -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원시시대에, 역사에 대한 자의식 없이 그려놓은 동굴벽화가 그 시대에 대한 하나의 기록으로, 결국은 인간의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과 같다. 지식인은 글을 쓰며, 그의 글은 미래의 '고고학'의 문서로 취급될 것이며. 그 문서로 말미임이" 미래의 인간은 과거를 획득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발언 그 자체가 동시에 기록이기 때문이다그 기록할 영역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작가 혹은 인문, 사회. 교육, 예술, 종교 등을 담당하는 지식인은 그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며, 그 방법은 바로 자기의 위치에 대한 확신을 스스로 갖고 또한 은연중에 그러함을 드러내어야 한다. 즉 그들의 말이 진실임을 선포했을 때 진리라는 이름으로 그가 글을 당대의 사회를 비판하고 그 비리를 제시함으로써 쓰는 당위성올 확보하는 것이다역사와 사회에 혹은 정치에 도전적이면서, 적어도 스스로 지식인이라고 자부한다면, 비판적이며 끊임없이 미래에 대한 해답을 보여주고 틀린 답을 집어내야 한다. 그의 위치는 그 담론의 세계가 현실의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에 비례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재미있고 쉬운 저자를 좋아하면서도 무언가 더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무언가 더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작기에 점수를 주는 것이다. 그것은 수업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교사가 대하기 쉽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훌륭한 교사를 추천한다면, 엄해도 사명감을 가지고 수업을 하는 교사를 지목하려는 심정과 흡사하다.

그러나 더 나은 작가나 더 낮은 작가의 위상 체계가 문제가 아니라, 저자가 가지고 있는 입장 그 자체가 문제로 삼아질 수 있다. 어느 교사건 그들은 가르치려고 하며, 만약 가르치지 않는 순간 그의 존재이유는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말하는 자''듣는 자'의 입장을 설정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거의 불가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를 동등하게 하려는 토론이 있으나, 한꺼번에 두 사람이 동시에는 얘기할 수 없으며, 참석자들의 여론은 사회의 보이는 또는 안 보이는 발언에 의해서 조정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만약 말하는 자가 자기의 논리에 혹은 자기가 전달하려는 의미체계에 회의를 갖게 된다면. 그를 지탱시켜주는 언어가 그 언어를 의심하게 된다면, 그의 담화는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가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의 음성 속에 타자의 음성이, 자기가 거부하려는 자의 음성이 자기의 목소리를 빌어서 발언하다고 느꼈을 때, 듣는 자들은 말하는 자에게 대신 그 특권을 줌으로써 자기들은 면책 특권을 받게 됨을 은연 중 즐기고, 그 모든 책임을 말하는 자에게 전가시키려하는 음흉한 의도를 간파했을 때, 아니 그의 목소리가 사장된 침묵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그 배면에 흉측하게 달라붙어 있는 목소리의 죽음을 그 싸늘한 주검을 느꼈을 때, 생존하고 있는 음성은 침묵한 음성의 시체더미를 딛고서, 그 피를 빨아먹고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 바로 자기가 사용하는 음성은 역사 과정의 전 체계 속에서 그 역사를 지탱해주었던 특권의 지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 침묵의 소리가 너무나 깊어서 발화되는 음성이 그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고서 그 비릿한 피내음에 아니면, 수혈된 죽은 목소리가 살아있는 목소리에서 속삭이고 있을 때, 음성은, 말은, 지식인은 뒤흔들린다. 살아있는 목소리를 포기하면, 더 이상 발화는 존재하지 않게 되어 죽어있는 발화를 되살릴 수 없게 되며, 살아있는 목소리가 자기를 부정하는 순간 자기 안에 부정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지식인은 자기의 목소리를 듣는 자들에 의해서 부패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는 계속 말을 해야 할 숙명이기 때문이며. 그가 말을 한 뒤에 그 말을 얼마만큼 듣는 자들이 준수했는가를 나중에 심판할 수 있을 만큼 안전하게 숨어있을 신의 나라와 같은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심판만 할 수 있다면, 절대적인 심판만 할 수 있다면, 그는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듣는 자들은 자기들의 궁금증을 끊임없이 말하는 자가 풀어주기를 원하며, 만약 자기에게 맞지 않을 때에는 언제든지 배반한다. 그러나 그들은 듣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것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님을 아니 자기에게 맞지 않음을 알 때까지는. 왜냐하면 듣는 순간 그 타자는 자기의 일부가 되고 부정하면서도 그것은 자기의 모습이 되고 자기가 택했다는 책임감과 그와 같은 담론체계 속에 있다는 것 때문이다문제는 듣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자에게 있다. 듣는 자는 자리를 뜨기가 훨씬 더 수월하다. 그러나 말하는 자는 순간 듣는 자들의 눈과 귀에 붙들려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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