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대학자 연암 박지원은 우화소설<호질>에서 호랑이를 빌려 당시 조선의 위선적인 양반들을 질책했다. 그 ‘호랑이의 질책’이 오늘날 우리에게 쏟아진다. 극단 ‘신명을 일구는 사람들’은 연암의<열하일기>에 실린 ‘호질’을 소리극으로 꾸며 7월10일부터 8월2일까지 서울 대학로 세우아트센터 무대에 올린다. 영물 호랑이가 세상으로부터 현자로 존경받는 북곽 선생과 열녀로 칭송받는 동리자의 불륜을 꾸짖는 내용. 당대 양반과 위정자들에 대한 신랄한 조소가 넘쳐난다. 한편으로 그 질책은 2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중적이고 부도덕한 요즘 우리 시대에도 겨눠진다. 극단은 이번 공연에서 원작의 줄거리는 살리되 부도덕한 인간 군상은 오늘날 나타나는 유형으로 각색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청나라 말 사교육, 용산골 철거민, 청나라 미친 송아지 수입, 평화 횃불 집회 탄압, ‘최고로 시중을 잘 드는 놈’의 국민 의사 표현 탄압, 별셋 공화국의 재산 변칙 증여 등을 고발한다. 이덕인 연출가는 “우리 민족 특유의 조소와 통렬한 비판이 우리 소리가 지닌 풍자와 해학을 통해 더욱 생생하고 선 굵게 다가올 것”이라고 밝혔다.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과 호질(虎叱)
조선 영조․정조 시대(영조 : 1725~1776, 정조 : 1777~1800)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린다. 세종대의 전성기 이후 점차 기울기 시작한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두 번의 큰 외침, 당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으로 피폐해지다가 영조, 정조에 이르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과 혁신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멸망한 명나라를 추억하며 현실속의 청나라를 인정하지 못해 비현실적인 북벌을 주장하던 지배층들 사이에서도 분화가 이루어져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이 나타났다. 연암 박지원은 그 중 청나라의 앞선 문물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농업뿐만 아니라 그간 천시받던 상공업도 발달시켜야 한다는 북학파의 대표적인 관료이며 학자였다. 그는 1737년(영조 13)에 서울의 반송방(盤松坊) 야동(冶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字)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號)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다.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낸 필균(弼均)이며 아버지는 사유(師愈), 어머니는 함평 이씨(咸平李氏) 창원(昌遠)의 딸이다. 어려서는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랐고 1752년(영조 28) 전주 이씨(全州李氏) 보천(輔天)의 딸과 결혼하고서는 보천의 동생인 양천(亮天)에게서 공부했고, 처남 이재성(李在誠)과는 평생 동안 학문의 동반자로 지냈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1768년 백탑(白塔) 근처로 이사하여 당대의 신진 학자였던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공, 유금,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팔촌형인 박명원(朴明源)이 뽑히자 그를 수행하여 1780년 6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북경과 열하(熱河 : 지금의 하북성 承德,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던 곳)지역을 여행했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기록한 책이 《열하일기(熱河日記)》이다. 이후 1786년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었고, 1789년 평시서주부, 사복시주부,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 1797년 면천군수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1800년 양양부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 시절에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안설(按說)》 등을 썼다. 그가 남긴 저술에는 북학사상이라고 불리는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즉 비록 청나라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지만 그들의 문명을 수용해서 우리의 현실이 개혁되고 풍요해진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호질(虎叱)은 연암이 북경 사행을 수행하는 기간 중의 견문을 기록한 《열하일기(熱河日記)》의 한 장(章)인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실려 있다. 호질의 뒷부분에는 ‘이 글의 지은이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근세 중국사람이 비분함을 참지 못해서 지은 글일 것이다(후략)’라는 내용이 있어 연암이 여행길에서 들은 내용을 옮기거나 윤색한 글임을 밝히고 있으나, 글의 내용상 받게 될 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피하고자하는 핑계일 수도 있다. 호질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호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는데 마땅한 것이 없었다. 의사를 잡아먹자니 의심이 나고, 무당의 고기는 불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청렴하기로 이름난 선비를 잡아먹기로 했다. 그 고을에 도학으로 이름 높은 북곽선생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동리자라고 하는 젊은 과부와 정을 통하던 중에 그녀의 아들들이 그를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로 의심하여 습격했다. 북곽선생은 허겁지겁 달아나다가 똥구덩이에 빠져 겨우 머리만 내놓고 발버둥 치다가 기어 나오니 이번엔 호랑이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호랑이는 더러운 선비라 탄식하며 유학자의 위선과 아첨, 이중인격 등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했다. 북곽선생은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목숨만 살려주기를 빌다가 머리를 들어보니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아침에 농사일을 하러 가던 농부들만 주위에 서서 그의 행동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자 그는 농부에게 자신의 행동이 하늘을 공경하고 땅을 조심하는 것이라고 변명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당시 조선의 사정에 비추어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는 북곽선생으로 대표되는 유학자들의 위선을 비꼰 것이며 다음은 동리자로 대표되는 정절부인의 가식적인 행위를 폭로한 것이다. 특히 유학자들의 위선을 공격하면서 호랑이가 삼강오륜의 윤리를 절대당위로 조작한 북곽선생을 꾸짖은 것은 유학 일반의 독선적 인간관을 풍자했다고 할 수 있다. 호질은 그 형식에 있어 전기체를 완전히 탈피하였으나 순정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동음어를 교묘하게 활용하고 민담과 전설을 삽입하면서 생략과 압축으로 완성된 이 글은 연암 스스로도 절세기문(絶世奇文)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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