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영선 '죽음의 집2'

clint 2016. 4. 15. 14:18

 

 

 

 

연극의 처음 장면은 시골보건소. 의사는 한밤중 허름한 진찰실에서 있다. 느닷없이 폭우를 뚫고 웬 벙어리 소녀가 나타난다. 그녀는 막무가내로 의사의 소매를 이끌고 급한 환자가 있는 외딴 산골의 화전민 집으로 안내한다. 이상한 일은 이 집 사람들이 정작 환자를 보여줄 생각은 않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얘기만 해대는 것이다.

의사는 이 와중에 이 집의 안주인, 그리고 죽은 바깥주인과 형·아우처럼 가깝게 지냈다는 정체불명의 사내로부터 기이한 이야기를 듣는다. 극 속에서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느슨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하나는 바위, 다른 하나는 쥐에 관한 것이다. 가난을 못 이겨 산골로 흘러들어온 이 집의 원래 주인은 비탈길 한 쪽을 일궈 코딱지만 한 한 뙈기밭으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비탈길에 있던 많은 돌멩이들을 캐내 내동댕이친다. 어느 날 그 조그만 밭 한 가운데에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들어앉는다. 농사를 못 짓게 된 주인은 결국 이 바위와 싸우다 죽는다. 바위는 급기야 언덕 너머의 이 화전민 집까지 비집고 들어와 한 다리를 걸친다. 화전민의 정착으로 삶의 터전에서 쫓겨난 돌멩이들의 화신이다. 무대의 집 뒤쪽으로는 이 거대한 바위의 일부분이 몸을 드러내고 있다. 쥐는 원래 이 집의 아들이다. 고기를 좋아하던 이 아들은 찢어지게 가난해 고기를 살 형편이 못 되되자 대신 쥐를 잡아먹다 쥐가 되어버린다. 황당한 설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벙어리 누이는 오빠를 인간으로 되돌려 보려는 한 오라기 희망을 안고 자신의 허벅지 살을 쥐에게 먹인다. 의사가 원래 보려던 환자()는 보지 못하고 피를 흘리는 소녀를 치료하려 치마를 들추는 순간 소녀는 놀라 막혔던 말문이 터진다.

 

 

 

 

 

우화나 부조리극이 흔히 그렇듯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등 희극적 요소가 많다. 그러나 자연의 파괴 또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 등, 극이 전하는 메시지는 뚜렷이 전달된다. 이 같은 메시지의 전달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장인물은 화전민 집에 사는 정체불명의 사내다. 그는 신비스러운 인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의사가 시골보건소에 2년 계약직으로 와서 어서 빨리 경력관리를 해 서울로 올라가는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미 꿰뚫고 있다. 그는 환자를 보러 온 의사에게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하도록 압박한다. 또 극중 웃음을 자극하는 대사도 대부분 그에게서 나온다. 작품은 쥐와 바위 이야기를 통해 사회 상류층인 의사와 극빈층인 화전민과의 대립, 또한 인간과 자연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중반까지 신비스러운 인물로 그려진 정체불명의 사내가 후반에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고 세상 물정을 좀 아는 사람" 정도로 소개되면서 등장인물 성격의 일관성이 다소 결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우화나 부조리극 성격의 연극에서 이 사내가 돈, 명예, 권력 등을 얘기하며 지나치게 교훈적이고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대사를 치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그렇게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극작가가 있다. 윤영선이다. 그것은 그의 발표작을 페스티벌로 묶었던 동료들의 무대가 남긴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되는 그의 이름때문이기도 하며, 아직 무대화되지 못했던 그의 미 발표작이 공연된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극단 백수광부에서 초연으로 공연되는 <죽음의 집2>는 그렇게 극작가 윤영선의 멈추지 않는 연극에 대한 열정을 잇는 무대로 살아난다. 생전에 채 끝내지 못한 초고는 극작가 최치언이 가다듬었다. 문학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들이 시대와 현상을 뛰어넘거나 미래를 예견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담고 있듯, 이 작품 역시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우습게 대하는 현대사회를 명확하게 투영하고 있다

 

 

 

 

비가 쏟아지는 늦은 밤, 집으로 찾아온 벙어리 여자에게 이끌려 산골마을로 왕진을 가는 의사. 도착해 보니 그 곳엔 화전민이었던 가족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노파의 죽은 남편과 각별한 사이라는 사내는 자신이 힘들게 살아왔던 시절의 이야기만 늘어놓는가 하면, 노파는 환자인 아들을 의사에게 보여주기 위에 깨끗이 몸을 씻기려다 손을 다쳐서 나온다. 시간이 지나도 환자는 보여주지 않고 가족은 알 수 없는 기대와 의심스런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황당한 일들이 계속 되고, 이상한 느낌을 갖는 사이 조금씩 그 집에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면서, 의사는 자신의 힘으로는 환자를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 시골의사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듯한 연극 <죽음의 집2>는 고윤영선 작가의 유고작으로 2012윤영선 페스티벌에서 낭독공연을 통해 처음 소개되었다. 2004년 집필했던 작품이지만 초고를 완성하지 못했던 작품이다.

기묘한 분위기, 미스터리한 극적 구조를 지니고 있는 이 작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여인에게 이끌려 낯선 집에 왕진을 가게 된 의사가 정작 환자는 보지도 못한 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만 늘어놓는 사람들을 만나 보내게 되는 악몽과도 같은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마치 카프카의 시골의사의 한국적 변형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이 작품은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경계 속에 감춰진 비밀을 풀어가는 형식으로 극적 상상력을 확장시키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가족과 그들의 세상 속에서 환자를 고치려고 애쓰는 의사는 자신의 몸을 희생해야만 치료가 가능한 상황에 직면하고, 결국 치료를 포기하게 된다. 연극 <죽음의 집2>는 그런 의사의 모습을 통해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 한 인간의 내면과 현대사회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의 존엄성, 예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서로에 대한 이해와 포용 없이 표면적으로 이루어진 관계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비극적 코미디로 보여주었던 연극 <파티>(윤영선 작)처럼 <죽음의 집2>는 상징화된 이미지와 독특한 캐릭터와 함께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전개된다. 코러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노래와 움직임을 통해 작품의 재미와 긴장감을 높였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생겨났던 최하층민인 화전민과 의사를 대비시켜 경제적 지위와 계층, 이념과의 갈등으로 점철돼 있는 현대사회의 병폐를 마주하게 한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송유억 '일상다반사'  (1) 2016.04.15
김광림 '너도 고백해 봐'  (1) 2016.04.15
윤대성 '열쇠'  (1) 2016.04.14
김태수 '코메디클럽에서 울다'  (1) 2016.04.13
김순영 '삼류배우'  (1) 2016.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