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오태석 '버어남의 숲'

clint 2015. 11. 17. 10:30

 

 

초기 오태석의 모노드라마 작품이다.
약장수,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오뚜기등 모노드라마를 다작한 작가의 초창기 작품으로 별로 공연이 안되었고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다.
'버어남의 숲'은 멕베드 작품에서 나오는 지명으로 왕이 될것이라는 예언으로 왕이된 멕베드가 불안한 마음에 세 마녀를 찾아가서 듣는 예언 중에 나온다.. 버어남의 숲이 움직일때 여자가 낳지 않은 사람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결국 버어남 숲이 움직이고 (위장한 반란군에) 제왕절개로 태어난 맥더프의 칼에 죽게된다.
현대에는 버어남의 숲이 움직인다고 하면 민심 이반이 심하다느 뜻으로 정치 기사에서 볼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오태석의 작품에 제목의 뉘앙스와 별반 작품의 연관이 없다는 걸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한 청년의 결혼전 현재의 아내와의 연애시절을 그리며 사설처럼 독백과 단역등을 오가며 펼쳐지는데 대학교때 사귄 여자는 영문과 재학생으로 국문과인 자신과 대비해서 더 국어를 사랑하는 것 같다고 하며 둘이 자주 다니던 불란서 문화관의 영화 관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실재 6,70년대 가위질 안 당하고 영어와 불어권 학생들을 중심으로 원작 그대로 영화를 상영해주는 이 프로그램은 인기가 꽤 있었다. 그러나 단점은 한국 자막이 없었다는 점인데.. 좀 난해한 작품은 그 스토리 꿰어 맞추기가 어렵고 연출 의도나 의미를 종잡을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 이 작품에도 그런 느낌을 표현한다..그리고 여하튼 청년은 그 여인과 결혼하게 되고.. 어머니의 뜻대로 애들도 낳게 되나 성경을 가르치더란다..

 

오태석의 '버남의 숲'은 현대문학 1972년 3월호에 실린 작품이다. 오태석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공연되지 않은 경우이다. 오태석은 현대문학 신인상을 받고 청탁으로 이 작품을 쓰게 되었으며, 배우 신구와 연습을 하다가 여러 가지 여건이 충족되지 않아 공연에 이르지 못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버남의 숲'은 남자 배우를 위한 1인극이디. '사내'는 관객들에게 아내와 있었던 일을 중심으로 비교적 일관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는 때로는 장면 화되면서 시각적으로 관객들에게 인지되기도 하고 남자 배우의 성대묘사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로 인식되기도 한다. 앞의 작품인 '육교상의 유모차'나 '약장사' 비해 삽화의 논리적 연결이 돋보이는 특색이 있다. 사내가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아내와 함께 본 영화에 대한 것이다. 사내는 이야기의 화두를 남대문 시상 밑에 있었다는 극장으로부터 끌어낸다. 상영 영화가 대부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왔을 것으로 생각되는 서부영화였고 '있다 없다 맘대로 변사'가 있었던 조그맣고 허름한 극장이었다. 이 극장 이야기를 통해 그는 영화에 대한 어릴 적 관심을 내비친다. 그리다가 아내의 제의로 불란서 문화원에 영화를 보러 간다. 아내는 자신과 남편의 생일이 같은 달에 있다는 것을 기화로 영화 동반 관람을 요구했고, 남편은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의 권고와 자의적 해석(반대를 찬성으로 이해)에 의해 극장으로 끌러갔다. 그곳에서 남편은 희한한 영화 한 편을 보게 된다. 영화 내용은 사내에 의해 시각적인 장년으로 무대 위에 재연된다. 장님인 남자가 닭과 신문을 들고 등장한다. 남자는 보던 신문의 중앙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으로 닭을 보다가 신문 너머 닭을 보다가 하는 시선 처리를 반복한다. 이에 대해 사내는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끌려 나왔다는 불만도 어지간히 해소된다. 다음 장년에서는 흑인 남자가 비에 젖어 옷과 양말을 벗고 있다. 경계의 눈초리를 빛내던 남자는 개의 소리를 내게 되고 이어 고양이와 닭의 울음소리도 내게 된다. 아내는 흑인 남자의 모습을 보다가, 문득 옆에 앉은 남편(사내)에게 그 모습이 닮았다고 말해준다. 아내는 영화를 보면 어떤 대목에서 남편과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지 알려주곤 했다. 심지어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 영화에서도 이러한 버릇은 여전했다. 남편은 아내가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장기 알 만큼씩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남편은 흑인 남자와 비슷하다는 아내의 말에 고무되어, 영화가 끝나기 전에 흑인 분장을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칠한 흑색 분장은 신제로는 백색 분장이었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은 분장하느라고 보지 못했던 결말에 대해 듣게 된다. 새벽녘이 되자 백인 여자를 범한 혐의를 받고 있던 흑인 남자가 사람들의 포위망에 갇히게 된다. 그는 더 이상 도망갈 수 없음을 확인하고 가슴 속 성경을 꺼내 기도를 드린다. 그는 베드로처럼 새벽닭이 울기 전에 당신을 모른다는 말을 세 번 되뇌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소원이 정말 실현되어 흑인 남자는 백인이 되어 추적자들의 의심을 따돌리게 된다. 그러다가 추적자가 물러나자 다시 흑인이 되는데, 이때 해도 잠시 검은 색으로 물든다. 사내는 구원받은 것이다. 사내의 구원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 어머니는 개의 소리를 통해 늑대의 해침을 막고,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통해 호랑이의 해침을 막으며, 닭의 소리로 지네의 공격을 물리치라고 권고했다. 또 사람들을 대비해서 성경을 넣어준 것이다. 아내의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자신의 어머니가 해준 공적을 이야기 한다. 부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남편의 어머니는 지극 정성으로 아들의 합격과 성공을 기원하며 부적을 마련했다. 아내는 이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 노릇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러한 선언은 남편의 마음을 거북하게 만든다. 그는 다음날 다시 불란서 문화원에 가서 그 영화를 다시 본다.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는 몇 가지 결함을 발견한다. 일단 닭을 안고 탄 사내의 시선 처리를 구경하다가, 백인의 발목을 보고 흑인 연기가 거짓임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베드로의 기적은 없었던 생이다. 베드로의 백인 변신은 카메라 조작에 의한 트릭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다음으로 비약한다.
어머니의 힘을 확인한 남편은 어머니의 방식대로 부적을 얻어다가 아내에게 준다. 아내는 이 부적의 효험을 보고 아들을 낳게 된다. 그 아이는 남편을 쏙 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남편은 그렇다면 자신이 그 애처럼 “눈이 멀고 발목이 까맣다는 소리”냐며 은근히 그 사실을 부인한다(이 대목만 보아서는 부인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다음 성경을 읽어 줄 시간이 되었다며, “아브라함이 이식을 낳고”로 시작되는 '낳고'의 계보를 훑어간다. '약장사'에서는 불경으로 끝을 맺는데 비해, 여기서는 성경의 한 구절로 끝을 맺는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하지만, 실제로는 잘 모르는 이야기를 종교 이야기로 에둘러 들려주려는 의도인 것 같다. 또 오태석이 말하고자 했던 '배신'의 문제를 담아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마무리는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종교와 삶과 영화가 봉합된 결론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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