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도 없이 발을 구르는 오리배 위의 연인들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계속 같은 자리인 것만 같은 열다섯!
하나와 소영은 만화 나나, 매니아! 라고 입을 모아 외치는 단짝친구다.
이름없는 자의 슬픔,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던 오묘한 관능과 비밀을
알게 된 하나는 자신을 이해해 줄 곳을 찾아서 홀연 떠난다.
한편 하나가 떠나고 남겨진 소영은 자신을 나나라고 불러주는 채팅창에서
우연히 만난 렌과의 만남을 기약하며 진짜 나나가 되기로 결심한다.
극은 각자의 환상을 찾아 떠나는 하나와 소영의 행적을 감각적이고
리드미컬하게 추적해간다. 조금 서툴지만 뜨거운 나이 열다섯을 지나
두 소녀는 무사히 열여섯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열다섯, 중2 하나와 소영은 친구다. 하나와 소영은 만화책방에서 만났다.
둘은 야자와 아이의 순정만화 <나나> (1999-2009)의 오타쿠이다. 둘의 만남은 나나, 7권 발매일로부터 시작된다. 둘은 "사랑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나나, 안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와 소영은 지금 나나로 사랑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나나와 렌의 키스는 늘 럭키 스트라이크 맛이 난다!" 입안에 체리를 물고 키스를 예행 연습한다. 이들에게 나나는 '그냥 나나'가 아니라 '우리의 나나'이다. 이들이 '나나'에서 배우는 것은 사랑보다 강한 우정이다. 동네친구 하나와 소영은, 나나에 나오는 이름이 같은 두 여주인공 고마츠 나나와 오사키 나나와 같은 단짝 친구이다. 이들에게 사랑은 아직 멀고 우정은 가깝다.
신해연 작가는 열다섯의 나이를 "죽도록 발을 굴러도 계속 같은 자리"인 오리배의 지루한 속도에 비유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체험학습을 나간 한강변에서 "쇼바를 잔뜩 높인 오토바이"가 "무자비한 속도"로 하나를 치고 지나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순간 하나는 아직 첫 키스도 못해봤는데, 죽기는 아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관심을 받는 것은 쓰러져서 다리를 절룩거리는 하나가 아니라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빨간 머리의 이승희이다. 이승희는 같은 반 친구이다. 학교 익명게시판에서 "좀 논다"는 아이로 유명하다. 승희에 비해서 하나와 소영은 아직 한참 어려보인다. 아직은 할머니의 군만두가 너무 좋고, 순정만화 나나에 푹 빠져있다. 이야기는 하나와 소영, 두 단짝친구를 중심으로 병렬식 에피소드 구성으로 진행된다.
하나에게 일말의 순간이 찾아온 것은 집 나간 아빠가 석 달만에 새엄마와 새언니와 함께 나타난 때이다. 하나는 새언니와 함께 "좀 놀줄 안다는 선배들과 좀 놀고 싶다는 후배들이 함께 모여 친목을 도모한다면 그곳" 곰돌이 노래방 3번방에서 "그저 노는 아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는 전설의 노래" 한스밴드의 오락실의 개사곡을 처음 듣는다. 이제 열다섯의 김하나는 노래방 책 사이에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관능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하나는 금연캠프에서 말썽을 피운 새언니의 담배를 맡아두다가 아빠와 다투고 집을 뛰쳐나온다. 하나는 집앞 골목길에서 첫 담배를 피우며 "어른의 냄새"를 음미한다. 새벽 골목길 가로등 아래에서 승희가 능숙하게 속담배를 피우고, 손가락 사이로 라이터를 현란하게 돌리는 것을 보고 부러워한다. 승희는 학교 게시판의 악플들에 대해서도 센 척, 누가 뭐라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하나는 신발매된 <나나> 11권의 유혹도 뿌리치고 승희를 따라 집을 나간다. 홀로 남겨진 소영은 PC통신 채팅과 천리안 만화게시판에서 위안을 찾는다. 이후는 단짝 친구 하나와 소영이 겪는 세상 밖의 이야기이다.
하나는 승희의 담배 피우는 모습에 반해 결국 승희를 따라 가출을 감행한 이후 노래방과 아는 오빠들의 집을 전전긍긍하고, 컨테이너 박스 집에서 본드를 흡입하고 환각에 빠진다. 소영은 천리안 채팅방에서 만난 남자와 만나기로 한 "코믹월드" 대회에서 너도 나도 나나와 렌의 코스프레를 하고 나타나 결국 '렌'을 못 만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하나와 소영의 성장통의 시기 내내 함께 했던 나나의 시기가 상징하듯, 이 작품에는 1990년대 청소년의 일상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듯한 풍경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1990년대 청소년들, 이른바 "좀 노는" 학생들의 하위문화가 성장통을 겪는 두 친구의 시선에서 아주 가깝고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머리 염색, 말보로 담배, 본드 흡입, 가출청소년들의 합숙소인 '가출팸', 노래방, 천리안 PC통신, 채팅방, 동호회, 오타쿠, 한스밴드와 변진섭의 노래 등 문화사적 에피소드들이 충실히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한편의 공연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을 때, 그러한 문화사적 에피소드들이 지금 현재 관객들과 어떻게 만나야 할지 아직 작가적 관점이 명확하지 않다. 1990년대로부터 20년이 흐르고 '오타쿠'는 '덕후'가 되었고, PC통신 동호회 채팅방은 인터넷 SNS의 네트워크 서비스로 진화되었다. 나나 소녀팬들도 학교를 졸업했고 결혼을 했고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이들이 지금 다시 그때의 나나,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30대가 회고하는 1990년대의 풍경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작가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실태보고서의 현실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해석된 현실'이다.
작품의 마지막에 하나와 소영은 다시 만나 말한다. "그래도 난 나나가 좋은데." "시시하다고 할 땐 언제고." "<나나>에만 있는 게 있으니까." 작품은 나나, 7권으로부터 시작해서 나나, 12권을 미처 다 읽지 못한 두 주인공의 이야기로 끝난다. 이 작품은 나나 세대의 소녀팬들이 자신들의 10대를 마무리하는 비망록이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의 캔디 캔디(이가라시 유미코, 1975-1979; MBC, 1977/1983), 그리고 1990년대 나나로 이어지는 순정만화의 계보로 돌아보는 소녀 세대의 목소리들의 지질학을 탐사해보는 일은 흥미롭다.
작가의 말 - 신해연
지하철 계단을 내려갈 때, 다리가 부러진 제비의 아픔을 떠올린다.
그리고 잠깐 상상한다. 이대로 내 다리도....
자의든 타의든 끊임없이 어디론가 발을 구르는 우리들
하지만 도대체 그 발구르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혹은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 조차 알 수 없는 순간들에 관하여
그토록 애를 쓰며 도달한 그곳엔 당신이 찾던 당신이 있었는지
열다섯 두 소녀는 각자의 모험을 떠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그 여름은 순식간에 얼굴을 바꿨지만
어깨에 발등 위에 희미하게 벌이 쉬다간 흔적들
그 여름이 남기고 간 자국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지형 '배타적 창작의 영역 ' (2) | 2025.03.06 |
---|---|
윤지영 '잃어버린 얼굴' (1) | 2025.03.06 |
한창수 '좌우지간(左右之間)' (2) | 2025.03.04 |
조정일 '달의 뒤쪽' (2) | 2025.03.03 |
윤성민 '내 무덤에 너를 묻고' (2) | 2025.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