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이전 마립간의 장례식을 마친 귀족들은 새 마립간으로 ‘눌지’를 추대한다.
그러나 강대국에서 온 대사가 23년 전 인질로 잡아갔던 ‘실성’을 데려와 강제로
왕위를 계승하게 한다. 실성은 23년간의 학대와 고립된 생활로 외로움 병을 앓고 있다.
자신의 외로움을 함께 할 것을 왕실 기록관 ‘내마’에게 강요하나 내마는 계속 거부한다.
실성은 내마를 설득시키기 위해 주위 물건들에 제멋대로의 이름을 붙이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하나 둘씩 깨뜨려 버린다. 그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눌지의 동생인 ‘미사흔’과 ‘복호’는 인질을 자청해서 강대국으로 도망가고
귀족들은 내마를 매수하여 실성을 달래려고 한다.
실성은 폭정을 계속하다가 ‘눌지’를 자신의 딸 ‘아로’와 결혼시킨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눌지를 죽여버리라고 내마에게 명령한다.
하지만 내마는 눌지를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폭군이 되어버린 실성을 향한
암살의 칼을 건네받는다. 결국 내마는 한쪽 팔이 잘려나가는 부상을 입고
새로운 시대를 열며 영웅이 된다. 죽지 않은 실성은 근위병으로 위장 잠입해 지낸다.
그러나 자유의 시대도 잠깐 절대 권력의 부재는 혼란과 혼돈을 불러들이고
수습할 능력이 없는 귀족들은 ‘마립간의 부활’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반면 민생 현안의 처리보다는 마립간이 누가 될 것인가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결국 눌지는 실성을 암살할 때, 마립간의 자리에 절대 오르지 않겠다던 맹세를 깨고
귀족들을 무력으로 물리치며 마립간이 된다. 이제 백성들은 자유를 찾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게 되지만 그 자유와 민주주의는 도리어 비능률과 혼란을 가중시킨다.
이에 항의하는 내마에게 눌지의 부인 아로는 스스로의 벌칙을-약속을 깨뜨리면 염소를
아버지라고 부름-지키겠다고 한다. 하지만 근위병을 시켜 자신의 염소를 죽이고
시장의 모든 염소를 매점매석하여 내마가 염소를 구해올 수 없도록 만든다.
눌지는 내마의 오른팔에 나무로 깎은 ‘정의의 (커다란) 손’을 달아준다.
이렇듯 쿠데타 후의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환멸을 맛본 내마는, 죽지 않고 근위병으로
위장한 실성 앞에서 마침내 자신의 외로움을 토로한다.
마지막으로 눌지를 찾아가 마립간을 포기하라고 설득하려던 내마는
권력지향적인 귀족들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내마」는 분실되었다는 장막극 「바악 왕」을 제외한다면 작가의 첫 장막희곡으로 1974년 초연 당시 말썽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이전 마립간의 장례식으로 시작되는 첫 장면에서 운구되어 들어오는 육중한 관이 저격당한 고 육영수 여사의 장례식 장면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강대국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강대국의 지원을 받아 지도자로 옹립된 ‘실성’과 실성의 권력악에 끝까지 항거, 개인의 정의와 신념에의 추구를 상징하는 ‘내마’ 그리고 실성의 옹립에 불만을 품으면서도 체념하고 미래를 기약하는 현실주의적인 인간형인 ‘눌지’로 이어지는 3각 구도의 대립을 보여준다. 실성을 암살하여 잠시 자유를 맛보는 듯 하나,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 상황을 이유로, 또 국가에 대한 소명을 앞세워 약속을 파기하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눌지에게서 수많은 권력자들의 말 뒤집기와 자기합리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실존적 개인을 억압하는 정치적, 사회적 권력의 폭력적 실재와 이에 대항하는 인간 존재의 절망적 상황은 인간 사이의 불신과 인간성 상실이 낳은 산물이며, 이를 극복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이상 추구만으로는 어렵다는 비관적 현실인식이 이 작품의 기저에 깔려 있다.
전반부가 실성의 폭력에서 민주의 승리를 그렸다면, 후반부는 민주의 타락을 그렸으니, 전반부가 소위 ‘보이는’ 권력의 과정이라면 후반부는 ‘보이지 않는’ 권력의 생리이다. 전반부가 절대권력에 대한 비판이라면, 후반부는 개개인의 소시민성에 대한 비판이다. 따라서 우화가 단선적인 당시 현실비판을 넘어서, 정의와 권력의 상관관계를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이상적 정의와 현실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바로 이러한 복합성에서,<내마>의 알레고리는 20여 년을 넘은 오늘의 관객들에게도 감동적인 것이다. 이러한 감동을 더욱 크게 했던 것은, 연출의 감각이다. 연출은<내마>의 관념성을 잘 전달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성을 살렸다. 우선 연출은 자유소극장의 무대 공간을 객석으로 돌출 시켜 극대화하여 활용하였다. 절대권력의 상징인 마립간의 왕좌가 객석으로 등을 돌려 설치되었으며, 객석 첫 줄과 거의 같은 위치였다. 왕관은 장난감 같이 조잡하여 절대권력의 허망함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검정을 주조로 하여 대체로 어두웠던 무대에 간간이 백색과 적색을 사용하여, 강렬한 대비를 느끼게 했다. 의상 역시 마립간이라는 용어가 지칭하는 신라시대 복장과는 다르게, 시대와 국적이 불명하다. 따라서 처음부터 사실적인 재현을 포기했다. 여기에 귀족들을 종종 코러스로 활용하여 연기를 스타일화 하였다. 또한 빛과 사소한 소리를 끊임없이 효과로 활용하여, 작품이 가진 관념성을 감각으로 상징화했으며, 이는 실로 놀랍도록 성공적이었다. 인물 해석에는 여성 연출가답게 특히 실성의 딸이자 눌지의 아내인 아로(노영화 분)를 부각시켰다. 희곡에는 달관형 실성과 정의형 내마 그리고 권력형 눌지의 대결로 그려지고 있으나, 공연에서는 눌지를 대신하여 오히려 아로의 대결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는 레이디 맥베스를 연상시키도록, 권력에 야심적이고 결단력이 있다. 그녀는 소외되었던 한 염소 소녀에서 눌지와의 결혼 이후 권력의 핵심부로 탈바꿈하는데, 이의 상징으로 그녀는 요란스럽게 치장한 높은 머리와 붉은 의상으로 등장하여 관중을 압도했다. 더구나 그녀의 관능적인 연기는 자칫 작품의 관념적 대결로 인해 딱딱해질 수 있었던 분위기를 묘한 생동감으로 채울 수 있었다. 실로 여성 연출가 특유의 섬세한 감각성과 여배우의 연기가 돋보였었다. 한마디로 작가의 관념성이 현대 감각적 연출로 빛을 발했던 공연이었다. -<세계화 시대 해체화 연극>, 이미원, 연극과인간, 2001
(……) 비(非)독재 상황에서의 무질서와 혼돈, 그 안에 잠재해 있는 독재에 대한 향수,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정치가 등을 그려 시대를 뛰어넘는 예언성을 확보하고 있다. 연출가 김아라 씨는 서사극 특유의 ‘소격(疎隔) 효과’를 이용해 희화적으로 해부한다. ‘소격 효과’는 극에 몰입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떨어져 관조하게 함으로써 생각을 통해 감동 받게 하는 방식이다. 정치의 모든 것이 논의되는 무대를 목욕탕의 욕조와 서류함의 성벽으로 설정해 놓고, 왕좌를 이발관의 의자로 꾸며놓은 것은 무거운 주제를 우화적으로 풀어간 원작의 의도와 맞아 떨어진다. 또 복화술을 이용해 염소와 이야기하고 표현주의적 느낌이 강한 커다란 탈을 이용해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와 함께 독재에 맞서 싸우다 잘린 사관의 팔을 과장해 키보다 더 크게 만들어 달고 ‘정의의 손’이라고 이름 붙인다. 드럼과 북, 빗소리를 내는 악기인 레인트리 등 다양한 자연음 악기와 아카펠라송으로 등장인물의 감정표현과 무대의 효과음을 내는 5인조 코러스는 ‘소격효과’의 백미를 이룬다.
- 문화일보, 1998년 4월 22일, 김승현
(……) 이강백연극제의 제1탄<내마>. 이 작품의 ‘키워드’는 염소다. 관객을 맞는 첫 음향은 여주인공 아로의 다중적 성격을 암시하는 염소 울음소리. 마지막도 염소의 그것이다. 그 음향은 단적으로 말해 히스테리로 중무장하고 있다. 극중에 등장하는 염소는 참으로 다각도의 상징물이다. 그것은 당초 아로가 천애고아로 내버려졌을 때 젖을 주고 살아가는 방법까지 가르쳐주던 보호자다. 동시에 그 염소는 외로움에 찌든 독재자 실성이 한사코 싫어하는 ‘고약한 짐승’이며 권력자의 변덕에 따라 메뚜기로도 변하는 이름없는 존재다. 관객 입장에선 매우 혼란스럽게도 염소는 이윽고 배덕자의 약속을 담보하는 헛된 신물로, 결국에는 욕심의 화신으로 변주(變奏)된다. 또 클라이맥스에선 피투성이의 두상으로 나타나 정의가 실종된 시대상황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키워드에 담겨있는 총체적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온통 미쳐 돌아가는 세상’일 것이다. 낱낱으론 저마다 구색을 갖춘 조각 그림이지만 합쳐놓는 순간 부조리한 형상으로 변하는 ‘내마의 염소’. 그것은 작가의 눈에 비친 불가해한 사회상에 다름 아니다. 김아라의 연출력은 대단하다. 1970년대 한국사회에 대한 냉랭한 시각 탓에 찬 바람이 감도는 원작을 볼거리 풍성한 풍자극으로 압축해내고 있다. 극중 대사의 속도도 거의 완벽한 계산 아래 성공적으로 조절되고 있다. 설명조의 대사는 알레그로로, 복선 부위는 안단테로. 특히 무대의 입체화로 우리 연극판의 평면성을 탈피하고 있는 점은 압권이다. 출연진 중 아로 역 노영화와 눌지 역 전진기의 호연이 돋보인다. 무대 배치와 소품 등에서도 공들인 태가 역력하다. - 세계일보, 1998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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