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분서갱유를 명한다.
하지만 진시황의 현명한 태자 부소는 그것의 부당함을 이야기하다가 밉보여
변방의 만리장성의 몽염장군을 감시하라는 명목으로 쫓겨난다.
이는 권력의 중심이었던 시황이 새로운 권력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듯 쫓겨난 부소는 만리장성에서 권력에 대한 한탄과 삶에 대한 과학적
실험과 붓끝으로 글을 쓰는 창작 대한 고뇌에 빠진다.
그러던 중 여러 약의 실험으로 부소 왕자는 여성화 되어가고 몽염 장군과는
미묘한 관계가 되어가는데... 그때 궁궐 안에서는 시황이 죽는다.
권력을 탐한 환관 조고는 시황의 죽음을 비밀에 붙이고 시황의 명을 빌어
부소 왕자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린다.
대장군이 되고프냐? 대장군을 시켜주마! 승상이 되고프냐? 승상을 시켜주마!
황제가 되고프냐? 황제를 시켜주마!
부소의 시선에서 진시황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진시황과 부소를 통해
권력을 둘러싼 인간의 군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진시황과 부소는 일반적인 아버지와 아들이 아닌,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넘볼 자의 관계이다. 자신의 ‘힘’, 사회적 ‘자리’를 놓고 대립될 수 있는 경쟁자인
이들에게 ‘자신의 인정과 존재’는 자신의 뿌리도 또 하나의 분신 같은 자식도
아닌 ‘권력’인 것이다.
이러한 태풍의 눈과 같아 보이는 ‘권력’의 중심에서 벌어진 ‘진시황제와
만리장성 그리고 태자 부소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그 ‘권력’을 중심으로
둘러싸고 폭풍 같은 욕망에 휩쓸리는 각기 다른 인물과 시각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흐르는 개선음악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이고, 태자 부소는 불로장생의 명약을 만들기 위해 매일 다양한 기구들로 실험하며, 연기하는 배우들을 때때로 자신이 그 역을 맡은 배역을 연기하는 것임을 알리면서 길고 긴 대사를 쏟아내는 등. 연극 [일월]은 진중한 주제의 묵직한 사극이라고 하기에는 간혹 엉뚱하다. 하지만 이러한 황당한 설정이나 독특한 상상력과 함께 버무려진 재기발랄하고 촌철살인 같은 대사를 숨겨놓고 관객을 주시하는 이 작품은 ‘권력과 인간’ 이라는 깊이 있는 주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위트 넘치는 재치와 매력을 보여준다.
'일월'의 공연에 대해 - 작가 장정일
이번에 실험극장에서 공연하는 <일월>은 여러 가지로 저에게 뜻깊은 작품입니다. 희곡을 쓰고 연극관련서를 탐독하는 한편 부지런히 공연장을 찾아다니던 30대 때, 브레히트의 서사극이 중국의 경극(잡극)으로부터 영감을 제공받았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영향을 받았다는 경극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고, 경극 대본을 접할 방법도 여의치 않았습니다. 그저 연극이론과 브레히트의 작품을 뚫어져라 읽으며, 경극의 실체를 추체험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아주 늦게서야, 지금은 문을 닫고 이름마저 사라진 모 출판사에서 중국 잡극을 모아 펴낸 책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받은 충격이란! 요즘에 나오는 새로운 연구는 브레히트가 경극으로부터 '소외효과'를 발견한 것은 서구인의 눈에 포착된 '창조적 오독'의 사례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경극이 '소외효과'를 수단으로 삼지도 않았으며, 목적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 눈에 단순비교된 서사극이론과 중국의 경극대본은 어찌나 똑같았는지, 브레히트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중국인들에게 아이디어 사용료를 내야한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잡극선을 읽고 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저는 아주 우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진시황에 대한 대작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나레이션을 듣게 되었습니다. 진짜 기막히게도 텔레비전을 켜자마자, 그런 프로그램이 연속방영되고 있다고 알지도 못했던 진시황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부, 마지막 나레이션이 흘렀던 것입니다. 기억이 희미하기는 하지만, 그 마지막 멘트의 요지는 '부소가 죽으면서, 진나라도 망하게 됐다' 였습니다. 방송은 그 한마디를 들려주고서는 서둘러 시그널을 울리며 끝나버렸지만, 그날따라 '부소가 죽고, 따라서 진나라도 망했다는 상황이 무척 낯설면서도 격하게 들렸습니다. 사소하면서도 별 새로울 게 없는 그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던 것은, 잡극선을 읽으며 발견한 경극의 매력이 저를 계속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차에, 위의 나레이션을 듣는 순간, 잡극선에서 받았던 충격이 <일월>과 같은 형식과 내용을 한꺼번에 얻게 된 겁니다. 진시황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신하이기도 했던 부소는 '충과 효'에 이중적으로 구속되어 있었고, 때문에 부소가 법과 질서의 현신이면서 생부이기도 한 진시황으로부터 독립과 자유를 얻는 것은 무망해보입니다. 해와 달, 만리장성 안과 밖, 남성성과 여성성 등등에 대립각을 세우거나 역사를 해체하면서 부소를 아버지와 충효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게 해줄려고 애써봤지만, 이제 그것의 실현 여부는 연출가와 배우 여러분의 노고에 몽땅 맡겨져 있습니다. 머릿속 에만 있고 보태지는 못한 아이디어로 좀 더 작품을 가다듬었다면, 그 노고를 덜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참고로 이 작품은 희곡으로 먼저 쓰여졌고, 그 뒤에 소설 <중국에서 온 편지>는 경장편으로 새로 쓰여졌습니다. 이 작품을 쓰던 1999년에는 OSMU(one source multi-us)라는 말이 일반적이지 않았지만, 이 희곡을 구상하던 애초부터 모노드라마. 2인극·뮤지컬· 시나리오를 함께 쓰고자 했습니다. 지금은 포기했지만, 막 이 희곡을 쓸 때는, 어서 시리오로도 완성해서 장예모 감독에게 번역본을 부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형식이든 내용이든, 모든 게 중국에서 왔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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