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황나영 '아는 사이

clint 2025. 1. 29. 12:37

 

 

여름의 열기를 피해 차갑고 좁은 욕실 안으로 두 소녀가 뛰어 들어온다. 
모처럼 학교 땡땡이를 친 혜주와 희원이다. 
둘은 그 안에서 셀카를 찍고, 성적에 대해 걱정하고, 
작아진 교복을 투덜거리는 등 18살 여고생의 일상을 나눈다. 
그러던 중 혜주는 단짝친구 희원에게 낯선 모습들을 보이게 되고, 
희원은 해주의 그런 모습들이 밴드동아리 선배 소희와 관련이 있음을 알고 
묘한 질투심을 느끼는데... 
세 여고생들의 경쾌한 수다로 시작한 극은 일상의 틈에서 부푼 마음들로 
채워지고, 욕실 안은 어느새 10대의 우정과 사랑에 대한 낯설고 혼란스러운 
감정들로 출렁인다.

 



연극 평 - 김옥란 (평론가)
연극 <아는 사이>는 고2 단짝 친구 혜주와 희원, 고3 선배 소희의 세 명의 이야기이다. 소희는 최근 진로상담 중 상담교사에게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했다. 영화에서는 동성애 이야기가 돼 일찍부터 자유롭게 이야기되는 반면 TV 드라마에서는 아직도 민감한 영역이다. 그런데 오히려 청소년극에서 동성애 소재가 심심찮게 이야기되고 있다. 청소년기의 동성애의 성 정체성의 문제는 그 자체가 현실의 반영이면서, 청소년기에 거치는 불안한 자아 정체성의 드라마의 하나로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만화나 판타지 등 청소년 대중서사물에서 동성애 코드가 보편적으로 다루어지면서 이미 익숙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세대 감각도 한몫하고 있다. 
<아는 사이>의 무대 공간은 욕실이다. 혜주는 부모와 독립해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 혜주의 공간은 부모로부터 독립한 개인공간이다. 그중에서도 욕실은 몸을 씻고 하루를 정리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다. 혜주의 단짝 친구는 희원이다. 희원은 혜주와 마찬가지로 학군 문제로 전학을 온 전학생이다. 희원은 혜주의 개인공간이 부럽다. 희원은 "엄마나 아빠나 아무나 막 들어오는" 그런 방은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혜주는 혜주대로 혼자만의 삶이 낯설고 두렵다. 당장 감전될까봐 무서워서 깜박이는 욕실의 전구도 갈지 못한다. 해주는 밴드부 선배 소희와 연인관계이다. 고3 소희는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며 상담교사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한 상태이다. 그러나 혜주는 아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선택의 문제에 있어서 조심스럽다. 해주는 소희와의 관계도 아직 비밀로 하고 있다. 해주는 단짝 친구 회원에게도 자신이 '이쪽'인 걸 말하지 않는다. 해주는 아직 자신에게는 "친구도 필요하고 가족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해주는 소희와 키스할 때도 "눈 꼭 감고 숨꾹참고" 말을 하지 않는다. 해주는 욕실에 물을 잔뜩 받아놓고 눈 꼭 감고 숨꼭참고" 잠수해버리는 습관이 있다. 불이 나갈 듯 깜박이는 전구는 혜주가 생각을 멈출 때마다 깜박거린다. 해주는 감전될까봐 무서워서 깜박거리는 전구를 바라만 볼 뿐이다. 모든 일이 아직 "해본 적이 없으니까 무섭다."욕실의 전구는 혜주의 혼란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장치이다. 극의 결말에서 혜주는 혼자 의자 위에 올라가 전구를 간다. 
이 작품에는, 청소년의 성 정체성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대의 일상의 풍경에서 개인들이 기성세대보다 훨씬 이른 나이에 개인적으로 독립해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선택하고 자기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동성애의 성 정체성의 문제도 이전의 일상적 삶의 패턴들이 해체된 상태에서 개인으로 남은 청소년 주체의 이야기로 다가와 더 흥미로웠다. 
이와 관련하여 서브플롯으로 제시된 희원의 '여덕', 일명 '여자덕후' 고백을 '커밍아웃'에 빗댄 '덕밍아웃'이라는 용어로 쓰고 있는 상황도 흥미롭다. 희원은 원더걸스의 소희도 좋아하고, 소녀시대의 태연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회원은 여자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편견이 두려워 여자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말조차 쉽게 하지 못한다. 여자는 남자를 좋아해야 하고, 남자는 여자를 좋아해야 한다는 이성애적 기준이 일반적인 것 같지만, 대중문화와 마니아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하위문화에서는 그런 기준들이 딱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취향의 문제는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닐뿐더러 단일한 기준이 적용되는 부분도 아니다. 감수성이 예민할수록, 감각이 발달할수록 세계와의 접촉 양상도 다양함 수밖에 없다. 가장 사적인 부분에 금기와 차별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가장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 운동의 슬로건을 가능하게 했고, 사회적 소수 문화의 중요한 이슈이기도 했다. 
혜주는 자신이 동성연인을 선택하게 되면 친구도 잃고 부모도 잃게 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의 삶을 선택한다.
희원 또한 자신이 여덕임을 밝힌다. 어렵지만 분명한 자기 선택을 한다. 혜주는 소희를 선택하며 말한다.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말 못한다. 아직은 말할 수가 없다.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나를 안 본다. 그것이 내 전부가 되어버린다. 그래도 나는 너를 좋아한다. 이게 나의 전부는 아니다. 혜주는 내 안의 '여러 개의 나' 중에서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선택하는 삶을 산다. 이 작품은, 자신들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 진지한 문제의식을 가지는 여리지만 단단한 인물들을 차분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다. 

 

 

작가의 말 - 황나영
이것은 저의 음모론. 청소년들의 자라나는 몸을 통제하기 위해 일부러 교복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혜주와 희원, 소희가 어느 순간 제 통제를 벗어나 알아서 떠났습니다. <아는 사이>를 제가 쓰고도 참 몰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에겐 특별한 사연이 실은 꽤 흔한 일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거든요. 동시에 이 사회에선 흔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도요. 참 어려운 간극입니다. 그래서 청소년의 LGBT와 성(性)은 계속 이야기되어야 합니다. 아는 사이가 된다는 것,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생각은 때로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결코 모든 걸 아는 사이가 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다가가려는 시도가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 희곡을 통해 만난 모든 분들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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