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개정안 부결' (1963)은 옛날 '예그린' 사무실에 드나들 때 쓴 것인데, 본래 '국립극단' 에서 공연될 예정으로 프린트까지 다 마련해 놓았다가 갑자기 중지된 불운한 극이다.
이 극에 나오는 주인공이 정계를 휩쓰는 어떤 인물의 출세 담 같다는 말이 들렸기 때문이다. 중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섭섭한 생각이 들기보다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국의 오늘날(1966)을 또 한 번 생각해 보았다. - 작가 이근삼
한 사기꾼이 우연히 보르네오의 거부가 형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형을 찾아내어
회사를 차리고 큰 사기향각을 벌이다가 감옥에 간다는 내용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초점이
맞춰진 것은 시골이장에서 하루아침에 사장이 되어 상류사회의 관습과 비리를 흉내 내면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졸부에 대한 풍자이다.
이 극의 플롯정개는 지나치게 황당하고 우연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졸부의 행태에 대한 풍자도 지극히 상식적이고 피상적이다. 또 오석구가 아무런 처벌도 안 받고 시골로 떠나는 것도 희극의 결말로선 부적당한 면이 있다. 풍자의 중심인물인 만큼 그에 상응하는 전락과정을 겪으며 사회적 제재를 받거나 혹은 용서받고 새로운 사회에 수용되는 화해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희극의 비평정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텔레비 정, 냉장고 정, 피라노 정 등 문명의 이기인 동시에 물질적인 부의 상징인 요정들의 등장이 문명비판적인 역할과 졸부의 허영을 꼬집는 역할을 함으로 작가의 재치가 돋보이는 부분이라 하겠다.
이근삼의 희곡은 4․ 19와 5․ 16이라는 혁명 공간 언저리에서부터 시작한다. 전쟁이 가장 비일상적인 사건이라 한다면, 혁명도 그에 버금가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과 같은 비일상적 거대담론은 오래지 않아 일상의 늪에 빠지게 되어 모습을 감추거나, 아니면 그러한 사건들 자체가 일상화된다. 이러한 사정은 이근삼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소위 그의 ‘정치 극’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들조차도 일상화된 정치현실에 대한 풍자와 조롱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다. 이근삼이 마주하고 있는 60년대적 일상성은 정치, 권력, 문명, 서구화, 물신주의 등으로 채워진 하나의 풍경화를 구성하고 있는데, 이때 풍경화를 향한 시선은 소위 60년대적 근대성에 대한 작가의 대응 방식을 가리킨다. 이근삼의 희곡은 빈번하게 종래의 리얼리즘 연극 문법을 위반한다. 이때의 리얼리즘 연극 문법이란, 제4의 벽을 관습적으로 전제로 한 무대와 관객석의 분리, 사진(寫眞)의 사실감과 같은 효과를 내는 극적 광경의 자연스러움, ‘시작→중간→끝’의 서사적(narrative) 진행을 고수하는 인과적 구성(plot) 등을 뜻한다. 따라서 이근삼의 희곡을 넓은 의미에서 ‘비사실주의’ 연극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빠지기 쉬운 선입관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비사실주의’적 연극 경향은 통상적으로 ‘일상성’을 거부하고 있을 것이라는 선험적 판단이 그것이다. 극적 분위기가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사실과 그 연극이 ‘일상성’을 벗어나 있다는 것은 별개의 사실이다. 이때 우리는 ‘일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세속적인 개념을 벗어나 사회학적 시각을 빌릴 필요가 있다. 범박하게 표현하자면, 소위 모더니즘 계열의 연극은 가장 일상적인 소재를 가장 비일상적인 표현 방식으로 재현해 낸다고 할 수 있다.
이근삼의 희곡에서는 소도구로서의 ‘시계’ 또는 플롯을 추진하는 동인(動因)으로서의 시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손목시계, 괘종시계, 교회 종소리와 같은 근대적 시간 규율에 종속 당한 채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을 지속한다. 이때 시계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공간 점유 방식과 같은 모습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인간의 시선에 포착되는 세계를 자의적으로 분절하여 영상으로 고착화시킴으로써 공간에 대한 소유 의지를 가능하게 했고, 무엇보다도 이 기계를 통해서 인간은 이성 중심의 원근법적 사유 방식을 전개시킬 수 있게 되었다. 원근법적 사유 방식은 미래를 향해 진보한다는 진화론적 문명관을 낳게 했다. 이것은 물질의 양적(量的) 증가를 꿈꾸는 것으로서, 60년대 군사 정권의 낙관론적 역사관과 상동(相同) 관계를 이룬다. 이제 시간은 물질의 확장을 통한 발전 이데올로기의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 버렸고, 백화점과 아케이드에 진열된 상품처럼 교환 가치를 지닌 획득의 대상으로 변했다. 그러나 근대의 화려한 상품이 그러하듯이 시간은 획득이 가능한, 또한 획득해야만 하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손’의 권력으로 인간을 규율하고 분절하고 통솔하기도 한다. 따라서 원근법적 사유 방식에 의한 시간 및 공간 개념은 발전이라는 외면적 의미와 함께 소외라는 함의를 내재한다. 이러한 양상을 ‘낙관론적 시대관의 명암(明暗)’으로 불러도 될 것이다.
박씨 (잠시 후) 철구야, 몇시지?
철구 (보고 있던 雜誌를 놓고) 십분 전이요.
박씨 십분 전. 그럼, 십분 내에 못오면 오늘은 영 밖에서 자고 온다는 말이군.
철구 돌아오시겠죠.
박씨 무슨 놈의 사업인가 하는 걸 밤 열두시까지 …
철구 사업을 하려면 밤에 술도 마셔야 하고 교제도 해야 하니 자연 늦겠죠.
박씨 벌써 며칠째야. 이렇게 늦게 돌아오니. 요새는 통 집에서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어.
철구 바빠서 그렇겠죠.
박씨 서울에 올라오더니 너의 아버지는 올빼미가 됐어! 밤늦게까지 … 이게 뭐야! 석산 무당골에선 그렇지 않았다.
'인생개정안 부결' 에서도 ‘도시의 시간/시골의 시간’이 이항대립으로 위계질서화 된다. 도시적 시간은 오석구에게 있어 세속적 성공을 이루기 위해 알뜰하게 투자되어야 할 재산이다. 오석구는 자신을 이용하여 부(富)를 얻으려 하는 복석과 유돈불의 요구로 교양 수업을 받게 된다. 한두 달 동안에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문명, 인생철학, 사교댄스, 화법(話法), 웅변술, 논리학, 법학, 권투, 음악을 배우기 위해서는 꽉 짜여진 시간표에 의해 일상을 꾸려 나가야 한다. 근대 지식과 근대적 시간 개념을 익힌 오석구는 다음과 같이 위협적인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오석구 : 나 명동에 큼직한 절을 하나 세울란다. 현대적 건물로. 네온사인으로 장식한 절 말이야. 남대문처럼. 부처님에겐 (自己의 옷을 가리키며) 이렇게 영국제 옷감으로 만든 양복도 입히고… 모자도 씌워주고. 이것이 부처님에게 「보복」하는 길이야. (인생개정안 부결 중에서)
그런데 보르네오에서 큰 사업을 한다고 소문이 났던 동생이 육고(肉庫)집 백정으로 일하는 사람으로 판명됨으로써 신분상승의 욕망이 좌절된다. 결국 오석구는 도시에서의 허황한 꿈을 포기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작가가 도시적 근대성에 대해 일관되게 냉소를 보내고 있음을 본다. 작가는 오석구를 통해 물신주의라고 하는 자본주의적 광기(狂氣)로부터 사회적 상식(常識)의 세계로의 이동, 즉 질서(order)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이쯤 되면 이근삼은 반(反)일상성, 반(反)근대성을 대표하고 있는 작가처럼 보인다. 이근삼에게 있어서 일상적 경제활동은 허용될 틈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시의 도시 생활에 대한 작가의 일정한 비관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며, ‘영혼/물질’의 전통적인 이항대립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대는 천박한 물신 숭배자의 물건들로 채워져 있고, 도시 지향적 속물들은 시간에 쫓기며 이윤을 향해 질주한다. 이근삼은 당시 대중들의 낙관론적인 생활상과 예리한 대립을 보여줌으로써 ‘물질주의=속악한 것’이라는 등식을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속에는 화려한 서울 중심가의 바로 뒤에 널려져 있던 무허가 판자촌과 빈민굴 속에서 생존을 위해 일상생활을 추구했던 수많은 대중들의 욕망이 거세되어 있다.
불안감과 공포는<인생개정안 부결>의 오석구에게 자기파멸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이는 물신주의의 노예가 되어 버린 인간들이 적자생존의 냉엄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그 희생양은 결국 자신이 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물신주의의 노예가 되어 버린 인간들이 결국에는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물신주의의 희생양이 되는 부조리함을 풍자한다. 따라서 이러한 작가의 시각은 경제 개발을 통해 ‘잘 살아 보세’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대중의 도구적 합리주의를 비웃고 있다. 작가가 보기에 대중이 동조하고 있는 근대화란 교환가치에 의해 진정한 인간성이 소멸되고 건강한 상식이 전도(顚倒)되는 것일 뿐이다. 그 세계는 인간이 개재되지 않은 ‘물건’, 장식품과 사치품으로서의 물신(物神)이 존재하는 곳이다.
텔레비 精靈 전기의 힘을 빌려 뜨거운 것이 제 특색인데, 아무도 저를 사용해 주지 않으니, 당신 못지 않게 차가와졌습니다.
냉장고 精靈 (前略) 하필 이런 시골뜨기 집에 와서 제 구실을 못하고 있으니 …
텔레비 精靈 나를 이용한 사람은 이 집 식모밖에 없어. 그러니 우린 장식품에 불과해.(<인생개정안 부결>, )
이들의 발언은 60년대 물질주의 사회에서 본질적인 인간성을 상실한 채 물질적 풍요와 위선적인 명예만을 추구하고 있는 속물들의 추태를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따라서 이근삼의 문명 비판적인 시선에는 ‘탐식의 일상성’에 빠져 있는 60년대 세태에 대한 신랄한 조롱과 풍자가 내재하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도구적 합리주의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근대주의에 대한 회의(懷疑)가 스며들어 있다고 하겠다. 작품 속에서는 인물들이 ‘시간-기계’에 종속되어 근대적 시간의 분절과 반복 형식에 육체를 규율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근대적 시간은 자본의 축적 및 이윤의 창출을 위한 도구적 합리성으로 운용되는데, 작품 속의 인물들은 경제적 풍요를 위해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 지속한다. 이에 따라 인물들의 대사가 의미 없이 반복되거나 중첩되기도 하고, 교체 가능한 병렬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일상에 몸담고 있는 도시인들이 교환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물신(物神)을 숭배한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원근법적 사유 구조를 통해 이들을 원격 통제하는 것은 ‘경제’라고 하는 ‘최종심급(the last instant)’이다. 이때의 일상성이란 곧 경제적 근대화에 복무하는 인물들의 비본래적 일탈 현상을 의미한다. 이들 작품은 플롯의 인과 관계, 대사의 현실성, 무대의 사실주의를 벗어남으로써 모순과 부조리로 가치가 전도(顚倒)된 사회상을 비판하고 풍자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성과 근대성에 대한 이근삼의 비판적 시선은 실존주의 철학자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닮았다. 이근삼은 물질 중심의 일상성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왜곡시킨다는 문명관을 유지함으로써 60년대적 근대화의 어두운 면을 암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근대 도시 생활은 인간의 욕망이 분출하는 공간이 된다. 이 욕망은 대상을 철저하게 점유하는 방식의 폭력적 양상을 띠기도 하며, 배타적인 타자 의식을 띠기도 한다. 욕망에 갇힌 사람들은 물신(物神)을 추종하며 모든 가치를 교환 가능하거나 양적(量的)으로 환원할 수 있길 바란다. 자본주의적 욕망에 물든 등장인물들은 ‘성숙한 육체/미성숙한 정신’을 겸비한 퇴행적 성격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대상을 훔쳐보면서 시선 안에 감금함으로써 야만적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때 거리를 배회하는 자는 풍경을 특정한 인식으로 재구성하고 반성하는 ‘산책자’가 아니라, 욕망의 제물로서 희생당할 대상을 찾아다니며 무의미한 시간을 허비하는 ‘뮤자르’이다. 뮤자르에게 산책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며, 의미 있는 시간은 대상을 점유하거나 억압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때에만 가능하다. 흥미롭게도 논의 대상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무대의 ‘외화면(外畵面)’을 쉴 새 없이 돌아다니는 배회자이다. 이들은 영화관, 미군부대, 교회, 공원, 요정, 호텔, 카페, 양식집을 바쁘게 돌아다닌다. 그러나 이들의 배회는 진정한 의미의 산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산책자는 단순히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서의 자신의 시선을 드러내고 타자의 욕망 속에 자신의 욕망을 재현해 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닌다. 그 욕망의 대상은 여성의 육체, 심심한 일과를 잊기 위한 여흥, 신분 상승의 기회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속물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 없다. 무대는 이처럼 폐쇄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돌아다니다 귀가한 사람들이 배회의 흔적을 가지고 벌이는 갈등으로 채워진다. 이때의 갈등 양상은 무질서하고, 불합리하며, 산만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갈등에 보내는 이근삼의 시선은 냉소적이고 때로는 무관심할 정도로 건조하다. 이는 그가 일상성에서 타협과 굴종의 속성만 보고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저항과 생산성을 외면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재현 '대한' (1) | 2015.11.10 |
---|---|
이재현 '해 뜨는 섬' (1) | 2015.11.10 |
김은성 '죽도록죽도록' (1) | 2015.11.10 |
정경진 '홍어' (1) | 2015.11.10 |
손기호 '감포 사는 분이,덕이, 열수' (1) | 2015.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