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그의 내연의 상대와 함께 살고 있는 연순은 본처가 버젓이 살아있는 집안에 새살림을 차린 그들의 작태에 온갖 행패를 다 부려보지만 뉘 집 개가 짖느냐는 식으로 무시하는 인간 말종들의 반응에 천불이 날 지경이다. 30년 결혼생활에 바람피우는 남편 단속으로 피가 말라가는 엿 같은 인생. 그러던 어느 난 느닷없이 흑산도에 사는 친정엄니가 연순의 집으로 찾아온다. “식도 올리지 못하고 사는 딸이 미워 내왕조차 하지 않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이람.... 것도 식전 댓바람에 사위가 그토록 싫어하는 홍어까지 꿰차고…"
이런 연순의 팍팍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니는 다짜고짜 그곳은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며 염장을 지르는데. “아니 안방까지 빼앗긴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그냥 내 집을 비워주고 나오라고? 누구 좋으라고?” 연순은 이 모든 일을 꾸민 남편을 가만두지 않을 심사지만 그 인간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내연의 여자와 어디론가 몸을 숨기고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둘이서 호의호식 잘 살 테니 니는 엄니를 따라 친정으로 내려가라고? 천만에, 어림없는 소리지…" 그럼에도 서글픈 마음을 가눌 길 없는 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한편 30년 만에 딸네 잡을 찾은 말석은 기가 차고 억장이 무너진다. 흑산도의 영험한 무녀인 그녀는 갖은 운명을 타고난 딸의 기구한 팔자를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된 줄은 몰랐다. 모양새만 다를 뿐 한 치도 다를 게 없는 모녀의 운명 앞에. 이미 죽었음에도 그 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는 우둔하고 가엾은 딸. 말석은 딸이 생전에 그토록 좋아했으나 까다로운 남편 때문에 마음 놓고 먹어보지 못했던 홍어 요리로 제상을 차려줄 생각이다. 그 시각. 두 번째 부인인 미경의 간병을 위해 병원에 도착한 철규는 자살한 전처 연순의 원귀가 자리 잡은 집이 지옥처럼 여겨지는 남자다. 대학 시절 여행 차 들렸던 흑산도에서 우연히 만난 생명의 은인. 그러나 미친 듯이 빠져들었던 사랑의 유효기간이 단 1년에 불과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릎 쓰고 동거생활에 들어간 연순이 딸 문경을 가진 직후 철규는 그녀에 대한 성욕이 사그라졌고, 그때부터 연순은 철규의 외도를 억측하며 바가지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무당 딸이라는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일까? 설상가상 악담처럼 퍼부어 대는 저주가 예언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니 어찌 지겹고도 두렵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그 몹쓸 무병이 딸 문경에게까 유전된다면 ' 그래서 문경을 낳자마자 누이들에게 맡겨 일찌감치 미국으로 보냈다. 그런데 문경의 결혼식 즈음 병거 중인 연순이 외간남자에게 홀려 집안을 풍비박산 낼 줄이야…. 허나 그러한 불명에는 연순에게 충분히 이유 있는 반항이었다. 문제는 누구하나 그녀의 결백을 믿으려 하시 않는다는 것. 결국 그로 인해 이혼을 당하게 된 연순은 온 가족이 문경의 결혼식장에 있을 시각. 자신의 13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진다. 표면적으로는 열쇠 수리공을 불러 분을 따고 들어오려는 사채업자를 피한 것이지만 실은 어미 자격을 빼앗긴 것에 대한 체념이 더 크다. 그렇게 죽어도 풀지 못할 악연의 끈을 끊지 못한 채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집안을 배회하는 유혼…. 다행히 엄니가 만든 홍어 요리로 제상을 받은 연순은 그 모든 사실을 깨닫고 흑산도로 향하는데, 그곳에서는 그녀를 위한 마지막 제의가 기다리고 있다. 그 옛날, 연순처럼 흑산도 앞 바다에 훌쩍 몸을 던져 수중고혼이 된 아비와의 재회를 통한 환생의 빛이….
작가의 글
손암 정약전의 저서인 자산어보에 분어라고 나와 있는 홍어는 생식이 괴이하여 해음어 라고도 한다. 생식기가 둘이라 '만만하면 홍어 거시기' 라는 속어의 주인공답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가끔 암컷과 교미하는 수컷이 덤으로 따라 올라와 강태공들의 즐거운 후일담이 되기도 하는 홍어. 간혹 파도를 타며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그 열정이 부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연정이 제 진가를 다 발휘하기까지는 반드시 숙성을 거쳐야만 하리라. 그런 의미에서 인간사도 마찬가지 아닐까? 온갖 사연들이 난무하지만 삭힐수록 제 맛이 나는 홍어처럼 끈끈하고 골골한 정의 이중성. 증오의 끝에서 완성되는 참 사랑의 정의 앞에 남아있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모순을 그리움으로 남겨두는 것 뿐. 극중 운명이라는 바다를 유영하다 인연이라는 낚싯줄에 걸려 기구한 삶을 살아야 했던 연순과 말석 모녀를 통해, 그 어떠한 파격을 꿈꿀지라도 피해자와 가해사의 경계가 모호할 수밖에 없는 카리스마의 숙명을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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