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얘기 아님>(2004)은 세상을 독립적으로 실아가기 위해 애쓰는 젊은 여자의 얘기다. 주인공인 보험회사 기획실 직원 선희는 험한 세상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너무 잘해주는 남자친구 석영과 헤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최진아 희곡에서 데뷔작부터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특성의 하나는 종래 희곡의 집약된 사건과 극적 갈등이 아닌 여주인공의 자유로운 일인칭 내러티브로 극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유들유들한 부하직원 재우과 신경전을 벌이며 일에 시달리는 선희는 시도 때도 없이 공상과 회상과 환상에 빠져드는데, 늘 따뜻하게 격려를 해주는 석영이 공상의 단골손님이다. 그런데 석영과의 공상 도중 둘은 시골의 어머니의 물레방아와 나무 평상을 찾아가며, 그곳에 회사직원이 재우까지 끼어들어 시골풍경으로의 무대전환을 거들고 미숫가루를 마시며 두런대는 그런 시골집의 순간들은 어느새 어린 시절 책상 위나, 평상에서 잠들었던 기억, 그리고 "선희야 그만 일어나라” 하며 깨우는 소리로 연결되기도 한다. 험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젊은 처녀의 몸부림은 이처럼 현실과 여러 겹의 비현실, 시간과 공간들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연애얘기 아님〉이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연결되는 유희적 짜임새와 그 놀이를 즐기며 문득 문득 끼어드는 메타연극 적 커멘트와 몸의 도발이 이미 예사롭지 않은 작품이다.
사랑을 받는 것은 자아 확인의 한 방법이다.그러나 여기,이것을 거부하고 고통스러운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여자 선희가 있다.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처절한 이야기가 연극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선희의 선택에 당신도 공감할 수 있는가? '잘 들어, 나 너랑 헤어질 거야.' 주인공 선희는 문자를 통해 애인 석영에게 이별을 통고한다. "왜?"라는 당연한 질문을 던지는 석영에게 선희는 선뜻 대답을 할 수 없다. 사랑에 기대어 세상에 맞서는 법을 깨닫지 못하는 자신을 상대에게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그 쉽지 않은 이유, 선희의 이야기가 연극을 이끌어간다.
가족마저도 짐이 되고, 회사 생활은 뜻대로 되지 않으며,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선희의 모습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쉽지 않은 세상살이에 보호막이 되어 주는 석영의 사랑에 선희는 반발한다. "난 네가 왜 이렇게 좋니, 너 없이 어떻게 사니."라는 선희의 말은 연인에게 속삭이는 밀어가 아닌 고통스런 홀로서기에 갈등하는 거친 절규이다. 석영과 함께 있으면 몽롱해진다는 선희. 석영의 세계는 매몰차고 거침없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락 속에서는 진정을 없을 수 없다는 결론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에도 부치는 이별을 통한 성장을 선택하게 된다.
한편 선희의 친구 미진은 전형적인 가정주부 생활을 영위하며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해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죽음으로 세상의 한 가운데로 내동댕이쳐지고 혼자 살아가야 함을 깨닫는다. 갑작스레 찾아온 불행에 미진은 능동적으로 맞서기로 하고 선희는 그런 친구에게 축하인사를 한다. 보호막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며 성장통과 같이 그것이 있어야만 한 인간의 진정한 홀로서기가 가능하다는 이 논리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는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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