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신성우 '운수 좋은 날'

clint 2024. 3. 9. 15:15

 

 

 

 

멕베스의 평행 우주를 사는 현재 대한민국의 밑바닥 청년 두수. 
그는 버려진 노래방에서 약에 취해 몸파는 안나를 보살피며 살아간다. 
멕베스에게 뱅쿠오가 있었듯, 두수에게도 둘도 없는 절친인 
조폭 똘마니 쌍둥이가 있다. 
쌍둥이가 수금을 하러 간 점집에 따라간 두수는 

자신들이 다음 날 동이 트기 전까지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일확천금의 기회를 얻는다는 점괘를 받는다. 
그리고…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사라졌던 두수의 부친이 
조폭에게서 가로챈 커다란 돈 가방을 들고 두수를 찾아온다. 
두수가 하룻밤만 숨겨달라는 아버지를 받아주자, 
안나는 그를 죽이고 돈을 가로채자고 한다. 
점쟁이가 말했던 일확천금의 기회가 이것이 아니겠냐며… 
고민하던 두수는 결국 칼을 집어 들고 
아버지가 자고 있는 노래방 룸으로 들어가는데...

그리고 쌍둥이와 안나母가 여기에 나타나면서 일이 꼬인다.

쌍둥이는 돈을 잃어버려, 안나母는 안나한테 돈을 뜯으러.

그러다 낌새를 챈 것이다. 어떻게 될까....?

 

신성우 극작가



이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멕베스』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차용하여 우리 사회에서의 ‘전복(顚覆)의 가치’를 고민해보고자 한 작품이다. 멕베스와 뱅쿠오는 밑바닥 인생을 사는 청년, 두수와 쌍둥이로 바뀌며, 레이디 멕베스는 마약 중독과 원조 교제로 범벅된 가출 소녀가 된다. 『멕베스』의 패륜이 국왕살해라면, 이 작품의 패륜은 부모살해다. 그리고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의 인력거 호황은 로또로, 아내를 살리기 위해 먹이려 했던 설렁탕은 엑스타시로 바뀐다. 『운수 좋은 날』의 프로타고니스트들이 패륜적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는 사회로 복귀하지 않는 한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탈출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우리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당했으며, 벼랑 끝에 몰린 그들은 존속살해라는 극단적 형태로 자신들의 ‘생존 의지’를 발현한다. 물론 누군가의 생존 의지가 다른 개체의 말살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낙오된 개인들에게 생존마저 허락하지 않는 순간, 일탈과 저항은 반사회적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런 개인들에게 기존 사회, 기존 윤리에 대한 ‘전복(顚覆)’의 시도는 생존을 위한 가장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운수 좋은 날」이 「맥베스」를 토대로 만든 작품이라 밝힌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로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소재로 한 일종의 역사극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인공 맥베스가 마녀들의 예언에 현혹되어 권력욕에 빠지면서 욕망과 타락 그리고 파멸에 이르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먼저 밝히자면, 「운수 좋은 날」도 인간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닮아 있다. 물론 전자가 권력욕의 문제에 집중한다면, 후자는 금전욕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겠다. , 「운수 좋은 날」은 「맥베스」처럼 인간의 욕망을 다루면서도 시대에 따른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즉 이 작품은 인간의 욕망과 파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맥베스」의 중요한 화두이기도 하다. 두 작품의 관련성은 특징적인 시공간에서 그려지는 인물의 대사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운수 좋은 날」의 공간은 "폐노래방 혹은 버려질 물건들의 왕국"으로, 시간은 "평행우주 속의 몇몇 시점"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배경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들은 쌍둥이, 두수父, 안나母 에 해당하는 피에로, 영국신사, 바니걸이다. 극의 초반 안나가 안나母와 통화를 한 후 등장한 세 인물은 「맥베스」의 마녀가 극의 초반에 했던 대사를 하며, 「운수 좋은 날」이 「맥베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두 작품의 연관성은 단지 극의 구성이나 대사를 차용하는 정도에 머무르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맥베스」의 시공간과 '지금, 여기'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사건의 시작 전 등장한 세 인물이 나누는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은 빛의 속도나 차원에 대해 언급하며 무한한 시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극적 설정은 극의 마지막에 두수가 시간과 공간 그리고 끝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다시 강조된다시공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극적 설정은 단순히 「운수 좋은 날」이 「맥베스」에 영향을 받았다는 정도의 의미를 넘어선다. 구체적으로는 맥베스가 살았던 과거의 스코틀랜드와 '지금, 여기' 대한 민국이 연결되어 있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지만, 두 작품은 인간의 욕망과 파멸에 대해 다루고 있으면서, 권력욕이냐 금전욕이냐 하는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욕망의 대상이 바뀔 수는 있지만 인간이 욕망하고 그로 인해 파멸하는 비극적인 과정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원 불멸하다고 하겠다이처럼 이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지점은 「맥베스」라는 작품과의 연관성과 연극적이거나 우주적인 시공간의 설정에 있다. 그러나 욕망의 대상이 돈으로 설정되었기에 작품의 시공간 설정은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운수 좋은 날」을 인간의 욕망에 초점을 두고 살핀다고 할 때, 욕망의 대상은 ''이 된다. 작품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을 두고 엮여 있는 인물 간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는데, 각각의 인물이 「맥베스」의 등장인물과 연관성을 가진다. 쉽게 유추가 가능하겠지만, 두수가 맥베스, 안나가 레이디 맥베스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두수父와 쌍둥이는 던컨왕과 뱅쿠오에 그리고 안나母를 포함한 세 사람은 세 마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욕망의 대상이 권력이 아닌 돈이기에 인물의 특징은 「맥베스」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극중에서 돈은 쌍둥이가 속한 조직의 것이었다. 그런데 두수父가 쌍둥이에게 두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접근한 후 훔친 것이다. 그리고 두수가 훔친 돈을 다시 두수와 안나가 훔치기로 하고 두 수父를 죽이게 된다. 권력이 신분제라는 사회 구조 속에서 그 시대에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돈은 그렇지 않다. 돈은 누구나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의 욕망의 대상이다. 따라서, 「맥베스」에서 던컨왕이나 뱅쿠오, 그리고 맥베스가 가지는 인물의 특성은 「운수 좋은 날」에서 두수父, 쌍둥이 그리고 두수로 전환되면서 달라진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욕망이 불변한다고 해도 시대에 따라 욕망의 대상과 그 양상이 변화하기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의 욕망에 관해 따지기 위해서는 현실이라는 상황을 함께 살펴야 한다작품의 특성상 현실이라는 상황의 문제를 따지기 전에 우선 작품 안에 설정된 차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작품에서 시공간과 연결된 차원은 「맥베스」와 가장 긴밀하게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의도적으로 무대와 객석을 다시 '다른 세상'으로 구분하고 일종의 다른 차원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듯하다. 극의 초반 두수는 관객을 향해 말을 하며 그가 있는 세상과 관객이 있는 다른 세상을 구별한다. 이 대사에 따르면 극중 두수가 있는 연극이 이루어지는 차원과 연극이 끝난 후의 배우와 객석의 관객이 있는 차원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의 방식은 다르지만 안나도 '저세상'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기에, 이러한 구분이 극중에 있는 설정으로 판단할 수 있다현실이라는 상황을 다루기 전에 작품에서 차원의 문제를 따졌던 이유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현실이 우리의 현실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만약 작품 속 연극의 차원이 우리 현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라면 이 작품에서 현실과의 연관성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연극적이고 우주적인 시공간의 설정과 달리 두수와 안나를 중심으로 한 서사 자체는 특별하다기 보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조금 과장되고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차원에 대한 설정과 두 가지 역할을 함께 소화하는 세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극중 차원을 현실과 완전히 다르게 이해하려는 시도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어렵다. 이는 자칫 연극적 표현이 가지는 장점과 차원의 문제를 혼동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 문이다. , 작가의 의도가 어떻다고 해도 관객(혹은 독자)의 입장에서 「운수 좋은 날」은 지금의 현실을 이야기한다고 받아들이기 쉽다. 현실을 보여준다고 해도 운수 좋은 날이 의도적으로 극중 상 황과 관객을 다른 차원으로 설정하는 방식은 흥미롭다. 이 작품이 흔히 말하는 서사극이나 부조리극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만약 의도적으로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관객이 무대 위 상황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두수와 같은 인물이 무대와 객석을 다른 차원으로 구분하면서 생기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운수 좋은 날」의 극중 상황이 관객에 게는 현실의 문제로 여겨지기 쉽지만, 그 상황이 현실의 일시적인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여지기를 바라는 방식이 된다현실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했기에 시공간의 설정이 중요했겠지만, 이 작품에서 그만큼 중요한 다른 설정이 바로 인물의 대사이다. 두수와 안나의 이야기가 '지금, 여 기'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에 가깝기 때문에, 서사를 현실의 문제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그 자체로 거리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인 언어가 중요하다. 두수나 안나를 중심으로 한 극중 언어는 사실적이거나 추상적인 두 가지 경향을 가로지른다. 따라서 서사 자체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으면서도 상징적인 대 화를 통해서는 인물과 상황에 대해 관객(혹은 독자)이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효과는 언어와 함께 나머지 세 명의 인물을 통해서도 잘 나타난다. 세 인물은 이야기의 진행에 있어서는 쌍둥이, 두수父, 안나母로 분하지만, 이야기의 밖에서는 피에로, 영국신사, 바니걸 로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들의 역할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 살인 이후 파멸해가는 과정에서 피에로, 영국신사, 바니걸은 두수와 안나가 환영을 보며 괴로워하는 듯한 모습을 그려내는 데 등장하기도 한다. , 「맥베스」와 같은 이야기 및 시공간과 연관성을 만들어내면서도 극중 인물의 파멸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데 활용되기도 하는 것이다이처럼 운수 좋은 날이 인간의 욕망과 현실 문제를 다소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는 점은 긍정적이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쉬운 점 도 있다. 그것은 불변하는 인간의 욕망과 달리 앞서 언급했던 변화하는 현실이라는 상황과 관련된다인간의 욕망을 현실과 함께 고민하기 위해 '비극'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비극을 '고전 비극' '현대 비극'으로 나누는 입장에서 볼 때, 눈여겨볼 차이 중 하나는 인물에 대한 비교이다. 쉽게 그리스 비극을 의미하는 고전 비극에서 주인공은 영웅과 같은 고귀한 신분의 인물이다. 그에 비해 현대 비극에서 주인공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운수 좋은 날」은 「맥베스」와 차이를 가진다. , 「맥베스」가 왕이 될 수 있는 고귀한 신분의 인물이 타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운수 좋은 날」은 현재 우리 사회에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맥베스의 권력욕이 당대의 정치·사회적인 문제와 함께 설명됨 필요는 없다. 맥베스는 마녀들의 예언에 흔들려 유혹에 빠졌을 뿐이며, 그로 인해 왕과 신하의 관계를 저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맥베스가 권력욕을 가지게 된 현실 상황은 크게 중요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없다. 그에 비해 두수나 안나는 다르다. 그들은 현실의 문제가 있기에 돈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다. 그렇지만 그들이 왜 금전욕을 가지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 운수 좋은 날에는 현대 비극에서 인물이 잘못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찾기 힘들다누군가는 두수와 안나가 이미 가난한 상태로 폐 노래방에 살고 있기에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상 황 때문에 두 사람이 두수父를 살해하고 돈을 차지하려 했기에 극 중에 원인이 드러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고를 1등으로 졸업한 두수와 예쁘고 몸매도 좋은 안나가 왜 폐노래방에서 살고 있는지, 두 사람이 파멸에 이를 수도 있는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감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가 작품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그들이 금전욕을 가진 악인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 금전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소 시민인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사건 이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가 조금은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만약 이 작품이 완전히 현실을 벗어나 인물과 배경을 구성하고 이야기를 전개했다면, 지금의 표현 방식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연극의 층위가 생기면서 관객(혹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더 재미있게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작품은 다층적인 차원에서 서사만큼은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기에 인간의 욕망을 세밀하게 다룰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래야 인간의 변하지 않는 욕망에 대한 현대 비극이 더 잘 완성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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