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1865년 수학자인 루이스 캐럴에 의해 쓰여진 이야기로 그 동안 영화, TV물, 애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되었다. 하지만 연극은 <오! 발칙한 앨리스>가 처음이며, 性이라는 Code로 재창작 되는 것 또한 첫 시도이다. <오! 발칙한 앨리스>는 현실에서 금기라고 치부되는 ‘性을 은유와 상징을 통해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앨리스는 언니가 읽는 ‘야한 소설'에 대한 호기심으로 꿈속에서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게 된다. 성에 대한 통념과 기존의 가치관이 소용없는 나라, 그곳은 놀이동산처럼 흥미롭고 짜릿하다. 여행을 시작한 앨리스는 제일 먼저 동물들을 만나게 된다.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미국생쥐와 바람둥이 수탉, 거세당한 후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발발이를 통해 동물들의 세상에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앨리스. 그들과 헤어진 후 또다시 여행길에 오른 앨리스는 성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철학을 늘어놓는 굼벵이를 만나 담론을 펼친다. 세 번째로 만난 사람들은 초경을 시작한 남자와 처음으로 몽정을 경험한 여자다. 그들은 서로의 성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으로 인해 성별을 바꾸어보기로 한 연인. 앨리스는 그들이 왜 성별을 바꾸려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다음 여행지에서 앨리스는 놀랍게도 엄마와 이모 , 고모, 언니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앨리스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빨간당'의 당원인 그들은 여왕이 빨간색으로 상징되는 성의 자유를 억압한다며 혁명을 계획하고 있다. 고지식한 엄마와 내숭덩어리 언니가 본능에 끌리는 대로 행동하자 은근히 쾌감을 느끼는 앨리스. 다시 여행을 떠난 앨리스는 흐느낌에 이끌려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앨리스는 여자를 생각할 때마다 커지는 코로 인해 죽음을 앞둔 왕을 만나게 된다. 코가 조금만 더 커져도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앨리스가 나타나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를 외치는 왕. 앨리스는 인간의 성욕이 죽음까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행의 끝에서 앨리스는 왕의 부인이자 현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여왕을 만나게 된다. 여왕은 성적 히스테리를 갖고 있는 인물로서 생리 때만 되면 남자들의 코를 잘라내며 폭정을 일삼고 있는데...
그룹 動 시대의<오! 발칙한 앨리스>가 두해 만에 다시 한번 무대 위에 올랐다. 발랄하고 당돌한 성적 상상력을 젊은 에너지로써 거침없이 풀어내는 이 작품은 확실히 음습하고 어두운 곳에 갇혀서만 논의되던 우리의 곰팡내 나는 성을 양지로 끌어내 보듬어 주고 당당하게 사랑해 주려는 의미 있는 시도이다. 그러나 그 거침없이 전개되는 성적 판타지를 웃으며 바라보는 것과 동시에 더럽고 축축한 곰팡이가 끈질기게 떨어지지 않음도 재확인해야 하는 일은 확실히 유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건강하게 표출되어야 하는 자기표현의 자유’였어야 할 앨리스의 판타지는 여전히 햇빛이 충분하지 못한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성애적이고 생식능력이 있는 합법적 성인, 특히 남성의 성만이 권리를 부여받는 세상에서 미성년 여성의 성적 판타지는 불경하고 위험하다.<오! 발칙한 앨리스>의 주인공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우리 사회의 성에 대한 관념에 도전장을 낸다. 십대에게도 금지된 성에 대한 욕망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성에 대해서 주체적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것은 어른들의 내숭이나 고지식한 관념에 도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비록<오! 발칙한 앨리스>가 그 점에서 출발하는 작품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쩌면 십대 소녀를 등장시킨 것이 그저 사회적 금기에 도전해보자는 전략적 의도라고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연극은 이러한 주제에 대한 드물고도 중요한 문제를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앨리스의 성은 공식적으로는 금기이기에 그녀의 호기심은 왜곡될 가능성이 많은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불씨를 던지는 것이 내숭덩어리 언니가 어두운 한밤 이불 속에 몰래 숨어서 보는 음란소설 ‘릴라가 말한다’이다. 음란물과 성인들만의 수수께끼 같은 ‘전문용어’의 틈 속에서 스스로의 자발적 학습으로 구성된 앨리스의 판타지가 훔쳐보기(관음증)와 드러내기(노출증)의 모순 되고 왜곡된 욕망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한 판타지를 통해 앨리스가 건강한 성을 발산하고 표현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나아가 ‘이제 더 이상 혼란스러운 사춘기에 머물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고 위험한 낙관이다. 그렇기에 위선과 거짓을 발가벗기고 음침하고 축축한 곳에 갇혀 곰팡내를 풍기고 있는 우리의 불쌍한 성을 건강한 볕으로 바짝 말려주려는 시도는, 분홍색 이불 속에서 언니의 빨간 소설책을 눈을 빛내며 다시 탐독하는 앨리스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실제로 앨리스는 자신의 꿈속에서조차 성적으로 당당하고 자유롭기가 수월치 않다. 겉으로는 앨리스가 만나는 가지각색의 인물들을 풍자적으로 스케치하는 것을 통해 우리사회의 성적 통념들을 비판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 세계에서조차 그녀의 성은 가장 먼저 소외되고 유린되며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포르노그래피의 시선으로 자신의 성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도색잡지의 화보가 제시하는 것처럼 성적 매력은 전적으로 ‘작다, 크다’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그녀가 뜻을 잘못 이해하고 외운 전문용어 ‘몽정’은 주변의 어른들의 비웃음 속에 모멸감만을 남기며 순식간에 묵살된다. ‘릴라가 말한다’의 상황은 노란색 유치원 제복을 입은 두 어린이가 세 발 자전거 위에서 나누는 성행위의 이미지로 변하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성별을 바꾸려 하는 남녀의 관계는 가장 은밀하고 핵심적인 장면에서 은폐됨으로써 여전히 앨리스를 기만한다. 이렇듯 앨리스를 통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풍자로 보기에는 극 안에서의 그녀의 위치나 역할이 너무나 위태하다.
가장 염려스러운 장면은 여자만 생각하면 자꾸만 코가 커지는 병에 걸린 왕을 만난 앨리스이다. 그는 작고 귀여운 앨리스를 보자 죽어도 좋으니 자신의 코에 그녀의 발가락을 한번만 넣어달라고 애걸한다. 물론 이 장면에서 앨리스는 그를 동정한 나머지 눈을 딱 감고 자발적으로 그의 콧구멍에 발가락을 넣어준다. 그러나 이 장면이 무의식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불평등한 관계와 폭력이 작용하는 상황에서의 성행위이다. 미성년자인 어린 소녀 앨리스는 어른이고 남성이고 계층적으로 왕인 사람에 의해 (여기서 앨리스가 자발적으로 ‘좋다’라고 말했다는 것이 그녀의 성적 주체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행위의 정확한 의미도 깨닫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은 쾌감을 느끼지만 그 상대는 전혀 쾌감을 느끼지 못할 때 그것은 건강한 성적 대화가 아니며, 더구나 그것이 의지를 갖고 있지 않은 어린 아이를 상대로 행해진다면 재고의 여지도 없이 최악의 범죄이다. 변태는 테크닉의 변이형이나 취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사물처럼 이용하는 상황에 있다. 어린 아이를 상대로 하는 일은 상대를 사물로 만들고 존엄성을 말살하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 장면은 불행하게도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 같은 상황에 대한 변이가 되고 있다.
죄책감과 금기 없이 자신의 건강한 성적 욕망에 충실한 일, 솔직하게 나의 성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당당하게 사랑해 줄 수 있는 일, 숨기려하거나 포장하려하지 않고 정당한 이름으로 성을 불러주고 드러내 주는 일에<오! 발칙한 앨리스>가 즐겁고 경쾌한 에너지로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러나 분홍빛 조명 속에서 불도 못 켠 채 릴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가 햇빛 속으로 나가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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