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藥을 드릴까요?>는 현대 사회와 현대인의 병약하고 집착적인 단면을 풍자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당사자들은 자신의 나약한 면과 그로 인해 빚어지고 있는 병폐에 대해 얼마나 알고 느끼며 살고 있을까. 어떤 허상을 좇으며 그 허상의 세계에 빠져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극에 의미심장한 소품으로 사용된 화초. 그 화초는 강장제에 중독되어 약으로는 회생하기 어려울 듯하다. 어쩌면 청년이 한 말처럼 물과 희망, 애정이라면 살려낼 수 있을까. 그 화초처럼 우리들도 약에까지 중독되어 면역성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희망을 잃고, 단지 허상에 집착하며 세상과 자신을 괴리시키며 스스로 병들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일지 모른다.
<작가의 글>
연약한 저마다의 인간 군상들은 모순으로 가득하여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든 세상을 살아가며 서로 극심한 의사소통의 장애를 겪고 있다. 사람들은 소외의 상처를 저마다 마음의 음지쪽에 감추어 두고 대신 그 통증을 견디기 위해 본능적으로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방법을 선택한 듯하다. 그것이 영화든지, 인터넷이든지, 쇼핑이든지, 섹스든지 무엇인가에 헛것에 사로잡혀 약간씩은 집착과 중독의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러한 것으로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슬픈 현실을 버텨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세상 풍경을 약국이라는 공간으로 축소시키고 상처 입은 인간 군상들을 약국을 찾는 손님들로 치환시켜 저마다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있는 현대인의 상처 깊은 내면의 모습을 연극적으로 조명해 보려고 한다.

도회의 변두리, 어디쯤 마을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약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어느 번개 치고 장맛비가 오는 날. 화초가 있는 약국의 시든 화분에 희망적인 조명이 들어온다. 여약사가 물끄러미 비오는 문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단정한 용모의 청년 한 사람이 찾아 들어와 공손하게 약국의 전화를 빌려쓴다. 약사에게 미안해하며 청년은 약국의 전화를 빌려쓰지만 통화에 성공하지 못한다. 이렇게 시작된 약사와 청년의 대화는 영화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화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청년의 모습은 자뭇 진지하고 행복해 보인다. 그러는 동안 약국에는 이러저러한 손님들이 찾아온다. 주식투자에 미쳐있는 남편에게 얻어맞고 살면서 낯선 남자와의 채팅에 맛을 들인 주부가 다녀가고, 잔뜩 음식을 먹고는 상습적으로 소화제를 찾는 뚱보 여인이 다녀가고, 인터넷 게임을 하느라 불면증을 앓게 되어 수면제를 찾는 꼬마 아이가 다녀가고, 무책임한 성관계에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공익 근무 요원이 다녀가고, 아무나 사탄으로 몰아세우는 광적인 예수쟁이 할아버지가 다녀가고, 부잣집 남자와 결혼할 목적으로 임신하게 되기를 소망하는 오피스걸이 다녀가고, 술 취해서 억지소리를 하며 행패를 부리는 취한 남자가 다녀간다.
도대체가 모두 뭔가 헛것에 사로잡혀 제정신이 아닌 듯한 손님들을 여약사는 매우 친절하게 상담해 주며 처방을 권한다. 그중 멀쩡한 사람은 오로지 약사와 청년뿐인 것으로 비쳐진다. 어떤 취한 손님이 여약사에게 행패를 부리자 문밖에서 지켜보던 청년이 곤란에 빠진 여약사를 도와준다. 청년의 도움으로 취객이 도망가고 나자 약사와 청년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얼핏 소통하는 듯이 보이지만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덜그럭거리는 그들의 대화가 차츰 퍼즐 맞추기 게임처럼 맞추어졌을 때쯤 해묵은 과거의 기억이 수면 위로 시체처럼 흉측하게 떠오른다. 알고 보니 청년은 십 년 전 이 약국에서 독약을 훔쳐먹고 죽은 방탕한 여자의 아들이었던 것. 당시 청년의 방탕하고 아름다운 어머니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그녀와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받아 키웠던 여약사는 지난 기억을 부정하며 냉정하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방탕한 어머니에게 죽어버리라고 했던 지난 시절의 기억에 죄의식을 느끼며 청년은 발광을 시작한다. 자살한 방탕한 어머니의 아들은 미쳐있는 것이다. 청년의 발광을 약사는 교묘하게 부추기며 청년의 친엄마에게 했던 것과 같은 수법으로 자살을 강요한다. 그러한 결정적인 순간 남자 간호사들이 들이닥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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