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80년대라는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서사극의 창시자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브레히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올바른 가치관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무대는 학생운동을 하고 있는 대학생들과 이산가족 현장. 잠시후 부모를 찾는 어린아이가 등장한다. 한창 이산가족과 인터뷰하던 리포터는 아이의 등장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인터뷰를 시도하고 방송을 통하여 친모와 생부를 차례로 연락을 취한다. 결국은 아이가 친모도 아니고 생부도 아닌 새로운 부모를 찾는다는 말에 어이없어하며 리포터는 퇴장하고 그 모습을 지켜본 대학생들은 아이에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야 한다고 구호를 외친다.
대학가 시위현장으로 변한 무대에 학생회장이 인기가수 복장을 하고 등장하고 학생들은 콘서트장에서 볼 수 있는 환호성을 지른다. 한창 열기가 극에 달했을 때, 아이와 함께 무쇠단의 마당극 <예스맨>을 공연한다. 새로운 가르침을 받으려는 대학생들은 더욱 단결을 하게 되고 갑자기 연기가 나오면서 코끼리 부대원들이 등장하여 강제로 부대에 입영시킨다. 누구보다 브레히트를 희생양으로 삼은 코끼리부대장은 브레히트에게 함정을 만들어 본의아니게 자신의 동료를 살인하게끔 음모를 꾸민다. 부대장은 죽은 브레히트의 동료를 간첩이라고 대 국민보고를 하고 브레히트에게 포상을 하지만······.
작의
연극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연극들이 그러했듯이 그 시대와 관여하고, 그 시대의 문제를 무대 위에서 상연함으로써 관객에게 시대의식을 고취시키고, 모순된 사회 현실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는데 그 생명력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위대했던 20세기가 저물었다. 20세기 후일담에 대한 얘기들이 미약한 상태에서 일찌감치 밀레니엄의 열풍은 믿어지지 않게 폭풍처럼 사라졌다. 그 자리에 다시 20세기는 남았고 21세기는 아직은 먼 느낌이다. 단순한 숫자 놀음에 놀아났다는 허탈감과 함께 새로워야 할 21세기의 시작이 지난한 일 천년만큼 퇴색되어 다가오는 것은 작가 개인의 고질적인 감상에 다름 아닌가?
이제 맞는 세기의 전환은 일 천년전의 벨에포크(Die Belle Epoque : 아름다웠던 시대 혹은 좋았던 시대를 뜻함.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쳐서 자본주의 발전으로 풍요로워진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한 특징적인 문예의 시대를 지칭하며, 환희에 들뜬 인생의 다양한 느낌들인 춤, 그림, 의상, 발레, 조각, 건축, 혹은 시와 연극 등이 서로 어우러졌던 시대를 말한다.)보다 외부적인 환경은 평화로와 보이지만 내부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보다 복잡하고 다양하게 숨어들었다.
작가는 20세기의 한 부분을 감히 되돌아보고자 한다. 거기에 대한 단초로 일찌감치 점찍어 놓았던 브레히트를 20세기의 대표인물로 설정한다. 브레히트의 삶은 그가 즐겨 쓰던 ‘모순’적인 삶이었으며 창작활동(연극)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는 ‘반미활동 청문회’에서 떳떳하게 사회주의자라고 말하지 못하고 다음날 외국으로 내뺐으며, 스탈린 문학상을 받기도 했고, 그토록 경멸했던 미국에서 시나리오 작업으로 연명했다. 또한 그는 스스로 경멸한다고 공언했던 사람들, 즉 시인, 지식인, 서양에서 극찬과 존경을 받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저작 상대로써 주장했던 노동자 계급, 당, 동양세계에서 하나의 관중도 얻을 수 없었다. 그가 살던 시대에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취한 단호한 행동과 상반된 행동은 20세기와 많이 닮아있고 우리의 80년대와 많이 닮아 있다. 브레히트를 바로 그 뜨거웠던 80년대로 초대한다. 그래서 위대했던 20세기를 돌아보고 실패했던 20세기를 반성한다. 또한 시작은 죽음과 같이 하듯이 브레히트 죽이기는 브레히트 살리기와 같이하며 브레히트 살리기와 브레히트 죽이기는 동시에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줄거리
1장. 새로운 부모를 찾는 아이
한 아이가 이산가족을 찾는 광장에 느닷없이 새로운 부모를 찾겠다고 황당하게 등장한다. 독일의 작가 브레히트는 “코카서스의 백묵원”에서 생부(길러주신 아버지, 즉 원작에서는 그루쉐)에게 아이를 주었다. 여기에 보다 확장된 의미를 둔다. 생부의 역할이 커진 것이다. 생부는 육체를 키우는 부모이면서 정신을 키우는 부모이다. 그래서 우리는 교사나 선생에게 또 다른 아버지로 존경해야 한다는 것이 뿌리깊은 관습이다. 오늘날에서 와서는 이러한 것을 부모가 혼자 할 수 없어 교사에게 배분을 하였듯이 앞으로는 보다 분화되어야 하고 확장되어야 한다. 여기에 교육개혁에서부터 시작하여 국가나 사회조직과 일련의 분위기들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아이는 처음에 친모의 ‘핏줄정서’에 이끌리다가 점차 생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결국은 그 커진 만큼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현실을 반영하는, 가출을 하게되고 급기야 새로운 부모를 찾는 것이다. 따라서 아이는 오늘날의 미아일 수밖에 없고 반항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가장 극단적인 현실의 우리 아이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2장. 새로운 사회를 찾는 대학생들(80년대의 대학생들과 예스맨 공연)
아이가 80년대의 대표적인 인물인 브레히트와 만나게 된다. 우리 근대사에서 마지막 학생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는 80년대를 마감하면서 일련의 쏟아지는 그때의 반성과 향수가 둘러싸인 이른바 후일담 문학에서는, 자신들 스스로 달래고 또한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면서 오늘날까지 정체되어 있다. 여기에 80년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학생회장과 브레히트가 등장한다. 그 동안에 피상적인 혹은 향수와 감상을 섞은 입장에서의 정리와 그들의 시각에서의 평가는 아직까지 객관적으로 평가가 미비한 상태이다. 우리는 이때 조금은 오해의 소지를 인정하면서 연극적 설정으로 두 가지 입장을 내놓는다. 바로 시대의 선구자의 입장과 그 속에서 스스로 빠진 모순(이들은 나름의 이론을 상정해 놓은 상태에서 작금에 갇혀있고 획일화되어 있는 일단의 사상)에 대해서 이른바 투쟁, 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그들이 기여한 것과 또한 스스로 모순에 빠지는 것은, 그들 자체의 방법론으로 전개했던 억압받고 소외되었던 것들을 드러내놓고 강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반대급부에 있는 이들과 같이 마찬가지로 하나의 틀을 세워 놓고 강제했던 것이다.
3장. 새로운 사회(코끼리 부대)
브레히트의 교육극 예스맨 공연으로 투쟁결의를 한 브레히트와 예스맨들은 코끼리부대에 강제 입영된다. 이곳은 군대의 형태를 띄지만 그것은 외형적인 거다. 일단의 사회의 불만을 지니고 있거나 소위 운동을 했던 대학생들을 모아서 사상개조 내지는 그렇지 못할 경우 우연한 사고로 사고사 처리하는 특수집단이다. 따라서 이 ‘코끼리’라는 것은 허위이고 가상이다. 하나의 틀을 가지고서는 그 동안 이들이 지니고 있던 생각들을 버리고 다른 하나의 이념을 주입시키고 믿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사고사로 우연스럽게 제거해 버린다. 여기에는 일반 군대의 획일화된 조직사회의 규칙들을 개인의 자질이나 성격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이었던, 지난날과 지금에 있어서의 군대의 이미지를 토대로 삼청교육대의 분위기와 과거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군대 내에서의 사고사를 아울러 포함시킨 것이다.
4장. 게임(아이의 양육권에 대한 하얀 동그라미 재판)
한편 새로운 부모를 찾는 아이는 이미 일심에서 친모에게 이심에서 생부에게 양육권이 돌아갔고 다시 아이가 상고를 해서 최종 법정이 게임의 형식으로 열리게 된다. 게임의 설정은 기본 일대일 이상의 관계에서의 기본 개념에 적용한 것이다. 재판은 그것 자체로 소위 드라마틱하다. 한 쪽의 의견과 반대의 의견이 대립되면서 결과적으로 두 가지의 것을 포함한 하나의 결론을 추출한다는 것은 다분히 변증법적이다.
처음에 게임은 친모의 감정에 호소하는 것에 점수를 더 준다. 그리고 점차 생부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에게 찬스게임의 승리를 안겨다준다. 하지만 하얀 동그라미 재판으로 결국, 아이가 새로운 부모를 찾는 것을 내버려둔다.
게임이 끝난 후 시간이 좀 흘렀다. 아이는 새로운 부모를 찾는데 이제 스스로 한계를 느낀다. 그래서 지난날의 영웅으로 생각했던 새로운 사회를 찾던 브레히트에게 편지를 보내 힘을 얻고자한다.
하지만 브레히트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끝내 다시 모순된 사회(코끼리부대)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행동을 하게되고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브레히트는 더 이상의 아이의 힘든 행로를 포기하고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하라고 조언한다. 그래서 아이는 영웅이 없는 불행한 자신을 한탄하는 편지를 쓰게되고 브레히트는 영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불행하다는 편지를 쓴다.
5장. 더 이상 새로움은 없다.(90년대 대학생과 노우맨 공연) 코끼리 부대의 희생자인 브레히트는 살아남기 위해서 동료들의 죽음을 목도하고 급기야 제대를 하고 다시 학교에 돌아온다. 전과 달라진 학교 분위기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유로운 날라리들을 보고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혹자는 대학로에서 춤을 추며 전에는 대학에서 행할 것들을(나이나 지위에 맞니 않는) 하는 것에 대해서 다 산 어른 같이 혀를 내두른다. 자신들은 그렇지 못했다고 공부하고 마냥 진지해야하는 이 시대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이들이 저래서야 쓰겠냐고. 그래서 어쩔 것이냐. 그들이 잠시 후에 당신도 인지하다시피 우리의 주역들이 아닌가. 이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우리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무엇을 강제하기보다는 조절을 하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네들의 장점은 어떠한 이론에 무지하거나 진지함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이론이 무너진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고 지나친 진지함이 외려 사회적 조화와 관계에서 불필요하거나 거부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형태를 띠는 것이지, 결코 퇴보나 정체는 자만한 자의 위험하고 쉬운 결론이다. 자 우리는 여태까지 한번이라도 지난 과거의 역사에 대하여 자유로울 수 있었나. 노우다. 이제는 그런 과격한 어쩌면 진짜 운동을 적어도 한번쯤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6장. 재판(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본다)
마지막으로 해설자는 오래 전서부터 코끼리부대의 비리를 조사했던 검사다. 재판은 코끼리부대에 대한 실체를 파헤치는 것은 물론, 스스로는 몰랐지만 동료들을 살해했고 계속해서 살아남았던 브레히트는 실제로도 살인의 제반 여건을 제공했다. 이들은 평범한 학생들을 현혹해서 사회의 모순과 비리들만 파헤쳐 이 세상은 타락했다는 것을 그만큼의 대안이 없는 비판을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새로운 사회를 부르짖었고 지금 밟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였다. 아무리 사회가 힘들다지만 극 속에서 우리는(굳이 예술가에만 이 책임을 받을 것이 아니라) 희망(대안, 제시)을 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판과 모순만을 파헤친 그들은 지난 시절, 충분히 보상받아야 할 성과물도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 또한 자신을 탓하고 사회를 탓했다. 그 대상이 대표적으로 코끼리부대이다. 이제 재판은 코끼리부대의 비리를 파헤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브레히트를 비롯한 그 시대의 순수와 또한 그 안에서의 획일성을 재판한다.
새로운 부모를 찾겠다는 아이가 자살을 했다. 그것은 브레히트의 ‘더 이상 새로운 사회나 부모 같은 것은 없다’라는 편지로 그 아이는 절망을 하고 급기야 죽게된다. 왜? 당신은 스스로 동료를 죽이고 자신이 너무도 경멸했던 곳에서 구차하게 살아남았으면서 한 아이의 희망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것인가. 그런데 여기서 다시 검사는 관객들을 고발하게 된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텔레비전에서 부대장으로 대두되는 역사를 이끄는 주인공들을 보아왔다. 바로 우리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곧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대학생들을 보아왔다. 말하자면 어쩔 수없이 조연들이다. 이 사이에 우리들이 있고 지금 극장에 앉아서 관극 하는 관객들이 있다. 이른바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힘없고 한편으로는 늘 제도권을 꿈꾸면서 그들을 욕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이들이 일어서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행동자세를 달리해야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사회 분위기와 이들 스스로의 의식변화를 거쳐야 한다. 따라서 한번쯤은 지난날의 어떠한 관습들을 부정하는 것이 일면 분명히 필요하다. 이것은 그 동안에 내정되어 있는 어떠한 모든 관습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본다’한다. 조금은 어설프고 한숨도 나오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본다 한다. 즉, 이렇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노력해야 할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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