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인 한쌍의 동반 죽음사건을 접수한 박형사는 그 노인의 아들 김만호를 찾아가 사인(死因)을 규명하려든다. 그러니까 김만호의 진술이 해설이 되면서 노인 김인규의 생애가 전개되는 것이다. 1921년생인 김인규는 신동(神東)으로 소문이 날만큼 영특하다. 그런 까닭으로 그는 일본인 소학교 교장선생의 눈에 띄어 그의 사위가 되면서 일본 유학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8.15 해방을 밍으면서 친일파가 된 김인규는 쫓기는 몸이 될 뿐만 아니라, 일본인 아내 미찌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김만호만 안동 근교의 고향마을에 남겨두는 꼴이된다. 그후 김인규는 다시 남로당원이 되어 귀향 하는데, 그의 품에는 또 다시 여자 공산당원과의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 김만재가 안겨있었다. 한편 그 고향마을에는 어릴적부터 김인규를 은근히 좋아했던 봉순이란 처녀가 있었는데, 그 처녀는 김인규의 연이은 결혼 때문에 끝내 결혼도 하지 못했다가 육이오 사변 길에서 갓난 여자 아이 하나를 줏어 기른다. 1966년.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된 다음해에 일본에서는 김인규의 첫번째 아내 미찌꼬가 잠시 귀국하는데, 그때쯤엔 김인규가 병적 인간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즉 그는 그간 세번째 부인까지 얻어서 딸 김만히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둘째 아들 김만재를 고등고시에 합격시키겠다는 집념으로 그를 방안에 감금시키는가 하면 이미 가출한 큰 아들 김만호를 거들떠 보려 하지도 않고 술독에 빠져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에 김인규는 둘째아들 김만재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용을 키우고자 했는데, 다시 보니 미꾸라지라"는 것이 그의 존속살인 동기였다. 다시 18년이 흐른다. 김인규는 복역을 마치고 지금까지 단 한번도 자식이라 여겨본적이 없는 큰 아들 김만호의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김만호는 결혼을 했고, 그의 이복여동생 김만희도 이태원에서 나이트 크럽을 경영하면서 흑인병사와 동거중이다. 그런데 출감과 동시에 또 한번의 결혼을 원해서 김인규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김만호는 생각다못해 이미 할머니가 된 봉순이를 찾아가 어머니가 돼 달라고 한다. 이에 봉순이는 거절한다. 그녀는 여전히 순수하기만을 원한것이다. 그러자 김만희가 나서서 술집 호스티스인 장애리를 골라 아버지의 후처로 삼는다. 그런 기묘한 생활이 얼만큼 지나자 장애리가 출산을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새로 태어난 그 아이는 노랑머리로 미군병사의 아들인 것이다. 그때 술에 취한 김인규는 "나는 동양 아이의 아버지이기도하고, 서양아이의 아버지이기도하니 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냐?"는 투로 시니컬한 푸념을 남기면서 그간은 미워했던 보람만 찾았노라 외치며 봉순이의 손을 잡고 고향을 찾아 가겠노라고 한다.
연극에 있어서의 통속성이 좋으냐 나쁘냐를 따진다는 것은 연극의 다양성을 스스로 제한시킨다. 때문에 우리는 그런 가부를 거론하기 전에 주제에 접근하는 연극인들의 의식구조에 대해서 우리 나름의, 혹은 평자 나름의 의견을 제시하면 그만인 것이다. 신파극을 가지고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 기호의 일방적인 강요인 것처럼 마당극의 경우도 그것을 좋아할 권리와 싫어할 권리가 있고 그에 따라 저마다의 이론이 동원될 수 있다. 연극의 통속성도 관객의 기호에 속하고 시대감각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 시류가 통속성을 매도하고 이데올로기나 철학사상을 생경하게 표면에 내세우게 되면 그런 시류에 쫓겨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는 숨을 죽이고 뮤지컬이 판을 치는 사태가 되면 민속탈춤 같은 것은 더할 수 없이 촌티 나는 공연물이 된다. 그와 반대로 마당극이 억지를 쓰는 거칠고 메마른 판에서는 뮤지컬물처럼 부박하고 천덕스런 예능도 없다. 우리는 경직된 사회구조에서 간신히 빠져 나오면서 다양한 예술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따라서 고급예술이나 대중예술이나, 생경한 사상이나 눈물 짜는 신파나, 또는 횡경막 이하나 자극하는 멜로물마저도 골고루 극장에 오르는 다양한 취사선택의 자유를 맛보고 싶다. 신파니까 고약하고, 통속물이니까 정서를 오염시킨다는 도덕군자 같은 발상법 자체가 편협한 것이다. 따라서 극단 대하의<신랑 나이 65세>가 신파조이거나 통속물이거나 상관할 것이 없다. 그런 취향을 좋아하는 관객도 있을 것이고, 그래서 작품의 질이라는 문제를 떠나서 흥행으로 성공하면 그런 성공만으로서도 한 극단의 운영개선에 도움이 될 테니까. 신파가 나쁠 것이 없고 통속물이라고 반드시 배척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런 작품을 쓰고 제작·연출하고 즐거움을 느낀다면 관객과 극단은 서로 그만한 수준에서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고 그것으로 연극은 충분한 대가를 보상 받은 셈이 된다.<신랑 나이 65세>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 통속성이 보다 치밀할 수 없었겠느냐는 구성에 대한 회의이다.
김인규(김진해)라는 주책 없는 노인이 예순 다섯에 새 장가를 들었는데 나이트클럽 출신의 마누라가 낳은 아이가 서양아기였다는 충격 때문에 그를 돌봐주던 동향 할머니(박승태)와 동반자살한다. 이야기는 죽은 아버지의 기구한 운명을 형사 앞에서 진술하는 아들 만호(이승호)의 입장에서 해설(이기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체로 연극에서 해설자의 입장은 등장인물과 전혀 연관이 없는 객관적 입장이거나, ‘서사적이라면’ 극중인물이 해설자가 되었다가 다시 극중인물로 환원되는 변신기법을 쓰게 되어 있다. 그런데 무대를 5등분해서 인물들의 등·퇴장과 조명의 각도를 잘 맞춘 연출 김완수가 왜 이 해설자의 기능을 이분화시켰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해설자가 형사 앞에서 진술하는 형식으로 관객들에게 아버지의 행적을 말해 줄 때 그 해설자는 큰아들 만호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니까 해설자는 큰아들 만호인 셈인데 그 역할이 분리된다는 것이다. 해설자 입장의 만호와 다른 연기자로 분장하여 등•퇴장하는 방법은 연출방법으로 가능하겠지만 관객 입장에서는 인물에 대한 더블 이미지 때문에 혼란이 생기고 그것이 연극적 흐름을 차단시킬 위험도 준다. 말하자면 우리는 무대 위에서 네 사람의 ‘만호’와 만나는 것이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원한으로 사무친 젊은 날의 만호가, 해설자로서도 실제 큰아들 만호로서도 등장하는데다가 나중에 가면 불쌍한 아버지에 대한 동정으로 효자 이미지를 갖는다. 해설자 만호와 큰아들 만호가 복합된다. 이런 기법은 인물 성격구성의 일관성을 위해서는 피할 수 있으면 피했으면 싶은 기법이다. 만약 그런 것이 연극의 통속성으로 해서 더블 이미지가 더 재미를 낳을 수 있다면 할 말은 없다. 우리는 오히려<신랑 나이 65세>에서 역사에 놀아난, 아니면 역사에 농락된 한 사나이의 기구한 운명을, 일본 교장의 사위로, 친일파로, 빨갱이로 전전한 한 사나이의 행적을 통해 형상화될 법도 하다고 믿기 때문에 지나친 역사의식의 생경한 이데올로기 대신에 통속적인 재미로 역사에 농락되는 한 인간상의 추적을 수용할 수도 있다. 재주가 뛰어난 수재라 할지라도 역사의식이 투철하지 못하면 전전하는 그의 삶의 발자취는 통속적인 이야기 이상으로 지양되지 못한다. 결국 자기의 좌절된 꿈을 아들세대에서 실현시키려다 큰아들은 집을 나간 일종의 반역아가 되고, 붙들어 놓은 둘째 놈도 고등고시 따위는 꿈도 못 꿀 미꾸라지 정도임이 판명되면 실망한 애비는 존속살인도 저지를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존속살인을 저질러 오랜 형무소 생활을 끝내고 큰아들 만호는 집으로 돌아온다. 예순 다섯 살의 늙은이가 다시 아들 하나 얻고 싶어서 새 장가 들여 달라는 통속적인 플롯 구성은 가장 멜로드라마적이다. 늙은이가 주책 없이 새 장가 들고 싶어하는 발상 자체가 아주 통속적인데다 여지껏 아버지를 배척했던 큰아들이 극적인 전개 없이 효자 노릇 하느라고 개성을 깎아나간 경로도 분명치 않은데 바로 그런 비논리성이 통속극의 표본이라 한다면 우리는 이야기의 반전에 재미를 붙이기만 하면 된다. 이야기의 반전은 만호의 배다른 누이동생이 데리고 있던 나이트클럽 여급이 계모가 되고 그녀의 전적이 탄로 난 노랑머리 아이의 탄생에 있다. 일제치하에서 해방과 6·25를 거친 세대의 통속적인 삶이 역사에 농락된 삶이라면 노후의 주책스런 새 장가의 파탄은 개인적인 삶을 스스로 농락한 통속적인 삶의 캐리커처이다. 거기에 양념으로 덧붙여지는 것이 그런 남자를 평생 사모해 왔다는 봉순이라는 봉건적 사회의 잔존 여인상이다. 그러고 보면 김인규라는 늙은이도 봉건적 사회의 마지막 인물이고, 그의 곁에서 뒷바라지나 해온 봉순이라는 늙은이도 통속적인, 가장 통속적인 봉건적 잔재의 인물을 대변한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라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거나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작품을 취사선택해서 관극할 수 있는 자유와 다양성은 결국 관객으로 하여금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마침내 선택의 질을 높여줄 수 있다는 점에 기여한다 할 것이다
작가의 글- 김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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