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차범석 '학살의 숲'

clint 2015. 11. 17. 18:28

 

 

 

 

차범석 작, 이진순 연출의 작품으로 '학살의 숲'은 차씨의 대표작인 '산불'의 속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한 지식인이 빨치산이 되어 겪는 비참한 체험담을 그린 이야기이다. 1977년 발표한 4막으로 이루어진 희곡으로 "암챙이골"에 고립된 공비들이 극한 상황속에서 펼치는 애증과 갈등을 그렸다.

 

 

 

 

 

 

1막에서 3막까지의 사건은 1951년 겨울, 공비들의 활동 무대인 가지산 암챙이골에서 벌어지고 마지막 4막은 교도소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다.

 

 

 암챙이골에 있는 공비들의 소굴에는 공산단 간부들과 공산주의 사상 때문에 자진하여 입산한 남쪽 사람들이 있다. 이들 중에서 규철, 민철, 삼철은 3형제가 함께 입사한 특이한 경우이다. 이발사였던 하명호는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입산했고, 그의 아버지는 이 때문에 홧병으로 죽었다. 가장이 위태롭자 그의 아내 이숙은 갓난아기를 들쳐업고 남편을 만나기 위해 백이십 리 위험한 길을 걸어 공비들의 소굴을 찾아온 것이다. 지도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숙에게 하산할 것을 명령하는데, 이에 이숙은 자살하고 하명호는 아내의 뒤를 따라 죽음을 택한다.

 

 

 

 

 

 막내인 삼철이 빨래를 하러 갔다가 삐라를 주워 큰형 규철에게 주고, 규철은 이것을 은밀하게 보관한다. 그리고, 박상배에게 전세를 묻다가 사상성을 의심받게 되고 삐라를 숨겨 놓은 것이 탄로나면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결국 규철은 인민재판부에 회부되고, 지도부는 동생 민철과 삼철에게 당성을 인정받고 형이 저지른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서는 쇠갈쿠리로 형을 처단할 것을 명령한다.···전세는 점차 공비들에게 불리하게 되고, 유엔군의 기총사격이 거세지자 박상배는 좌절하며 임연숙을 끌어안는다. 한편, 다른 공비들도 불안감에 사로잡혀 점차 신념이 흔들리고, 삼철이는 형의 비극적인 죽음 뒤에 정신 이상자가 되어 버린다.

 

 

 

마침내 공비들은 유엔군의 대공습으로 패망하게 된다. 패망으로부터 9년 후, 임연숙은 교도소 생활을 하고 있다. 김수녀가 끈질게 찾아와 전향을 권유해도 이를 거부하지만 마음이 흔들린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죽은 이들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었다. 끝내 임연숙은 지난 시절의 과오를 뉘우치고 종교에 귀의한다.

 

 

 

작가의 글 - 차범석

 

국사봉까지 올라가시려면 힘드실 텐데, 二月이라지만 그 산골짝에는 눈이 아직도 쌓인 데다가 바람이 맵기가 산고추 맛이지라우...."

1977210유치면사무소에 들렀더니 면장이 일러주는 말이었다. 해발 613미터 밖에는 안된다지만 옛부터 有治는 험한 산악지대인 데다가 6. 25동란이 후는 한때 남한 모스코바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으니 지방 사람들에게 있어서 有治는 각별한 뉘앙스를 풍기게 하는 地名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꼭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겠다고 우겼더니 마침 長興郡 副郡守로 있는 조규삼가 그럼 자신도 이 군에 부임한지 얼마 안 되며 그곳에는 가본 일이 없으니 같이 가겠다고 를 내라고 했다. 趙 副郡守, 文面長, 孫氏 그리고 6. 25당시 國戰에 직접 參戰했다는 長興警察署 情報課長과 나 이렇게 다섯 사람이 후로 國師을 향해 떠났다. 그러나 차가 오를 수 있는 지점은 國師 못미쳐 해발 5백미터의 迦智山 중턱에 있는 옥림경내였다. 소문에 듣기보다는 길이 잘 닦여있는 것은 지방민이 새마을사업의 일환으로 땀 흘린 결과라고 먄장이 일러주었다. 아직도 고드름이 바위와 계곡에 열려 있고 매운 산바람에 가시넝쿨이며 잡목이 흐느껴우는 속칭 암챙이골에는 아직 봄도 문명도 멀기만 하는 심심산곡이었다. 그 옛날에는 이 일대가 낮에도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밀림지대를 이루었고 당시는 이곳에 속칭 3지구 민청연대 17대와 각 지구당원과 그 追從者들로 구성된 공비 4천여 이 집결하여 양민을 괴롭혔던 곳이라고 설명했다. 나는 내가 살아나온 半生보다 더 허무하고 처절한 감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쓸어 올렸다. 지금은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이 큰나무는 남아있지 않고 겨우 잔솔밭이 되어버린 암챙이골! 지금부터 27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엔 혁명이라는 신기루를 믿고 목포, 해남, 영암, 강진, 등 전라도 각 고을에서 몰려와 살던 공비들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암챙이골! 낮에는 밭이나 바위틈에 숨어 살고, 밤이면 구호도 드높게 혁명가를 부르며 날뛰던 붉은 이리들의 서식처였던 암챙이골! 혁명과 해방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와는 달리 학살과 반목과 기아 (飢餞)가 덮쳐 인간 이하의 생지옥으로 화하였다는 암챙이골! 국보로 지정된 옥림사 대웅전을 불지르고 최후발악을 하다 마침내 그 사흘만에 전멸당하였다는 피와 원한과 망집이 얼어붙은 암챙이골!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가 겪어나온 처절한 역사의 한이 암챙이골에다 투영시켜봐야겠다는 생각아래 학살의 숲을 구상해왔었다. 1961에 탈고하여 이듬해 12에서 국립극장애서 공연되었던 산불은 어느 의미로 봐서는 학살의 숲의 속편에 해당되는 것이다. 따라서 순서로 봐서는 뒤바뀐 셈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엔 그만큼 戰爭 안겨다 준 상처가 깊고 아팠기에 執筆에 대한 겁이 더 컸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만큼 歷史를 정리하고 客觀性을 얻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뒤늦게 이 작품이 반공文學을 수상하게 되어 나는 나름대로 이 작품을 손질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때마침, 국립극장 運營委員님들께서도 作品에 대한 의견을 내주셨고, 演出을 맡게 된 이진순 선생의 연출方向과 걸음을 맞추어 수정을 가했다. 그러면서도 내 머리 가운데서 떠나지 않은 한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지난여름 우리 나라를 다녀간 이오네스코가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작품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말을 남기고 갔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작품이 거창하게 이데올로기에 근거를 둔 作品이라고 主張할 만큼 勇敢하지는 못하다. 다만 韓國人으로서 겪은 이 쓰라린 상처를 作品으로 남기고 싶었고, 조직이 個人을 말살하는 現代社會 부조리를 학살의 숲에서 그려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 인가라는 이다. 아니 서구인들이 작품에 投影시키는 問題와 우리가 当面하고 있는 이 이데올로기의 對決을 우리는 어떻게 균형화 할 수 있는가 하는 이다. 나는 그런 뜻에 서도 이 학살의 숲政治的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이데올로기 때문에, 마모되어버린 人間의 순수를 回復시키려는 의도를 더 밝히고 싶을 뿐이다. 韓國人으로서 겪어야만 했던 이 비극을 하여 무참하게 짓밟혀 버린 인간성의 復元을 위하여 이 삶을 써야겠노라고 생각했다. 그런 뜻에서 나는 이 작품이 口号로 그치는 반공이 아니라 휴머니즘을 渴求하는 뜻에서 쓴 作品이라고 우기는 것 뿐이다. 無知 속에서 자라난 婦女이건 기아에서 허덕이던 大學生이건 모두가 저마다의 어떤 欲求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한줌의 재로 돌아가 버렸고, 복수심에서 아귀처럼 날뛰던 한 女人我執도 끝내 허무로 무너지고 마는 이 몇 가지의 人生 삽화 속에서 나는 우리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내일의 빛을 갈망하면서 이 作品을 내놓았다. 끝으로 진순 先生國立극단 여러분의 勞苦에 감사하며 화려한 개막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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