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상열 '애니깽'

clint 2015. 11. 17. 14:55

 

 

 

 

1904년 5월 멕시코 국적의 화란-독일계 영국인 메이어즈는 멕시코 애니깽 농장의 대리인으로서 노동력을 구하기 위해 동경대륙 식민회사의 경성지부장인 오바 가니찌를 찾아와 불법이민 송출음모를 꾸민다. 1년여동안 1,033명의 조선 노동자를 모집한 두 외국인은 1905년 4월 4일 영국선박 일포드호에 이들을 승선시켜 제물포항을 출발한다. 당시 모집광고의 내용은 멕시코는 지상낙원이며 기후나 인심 그리고 대우가 월등하여 그곳에 가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는 허위 날조된 것이었다. 두달반의 긴 항해 끝에 멕시코의 살리나 크루즈항에 입항하여 육로로 베라크루즈를 거쳐 유카탄반도의 메리다 애니깽 농장까지 수송되어 32개의 농장에 분산 배치된다. 현지의 기후는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 애니깽은 가시와 독소가 많아 쉽게 상처를 입었으며 애니깽 밭은 독사가 많아 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계약기간은 4년이었고 급료는 하루에 35전 이었으나 4년의 계약기간이 끝나도 농장주들은 임의로 노동기간을 연장하였으며 급료 35전에 하루의 식대 20전을 떼고 15전씩 부당지급하였다. 더구나 하루에 애니깽잎 천개를 따지 못하면 옷을 벗겨서 기둥에 묶어 피가날때까지 가죽채찍으로 때렸다. 또 농장에서 사설경찰을 고용하여 탈출을 시도하거나 하면 즉각 총살을 시켰으며 조선노동자들은 현지에서 최하위인 7등노예 취급을 받으며 돼지우리간 겉에 똑같은 우리를 지어 기거하게 하였다. 조선 노동자들은 수없이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조선과 멕시코는 너무 멀었고 언어불통과 여비부족으로 대다수가 유카탄 근방에서 체포되어 죽음을 당해 암매장 되었다. 조선과 국교관계가 없는 관계로 멕시코인들의 횡포는 더욱 심하였다. 뒤늦게 이사실을 안 고종황제는 크게 분노하여 외무대신으로 하여금 현지파견을 명하나 국제정세에 어두워 겨우 하와이와 동경에서 여비부족을 핑계로 허송세월하다 돌아오고 만다. 이것은 일본의 외무대신 고무라의 간계가 작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현지에서 10년을 보낸 조선 노동자들은 이 끔찍한 사실을 임금께 알려야 한다고 중지를 모아 대표자 4명을 선발 농장을 탈출시킨다. 이들은 농장을 탈출 밀항선을 타고 쿠바의 마니치항에 상륙하나 밀입국자로 체포되어 사탕수수 밭에서 중노동으로 5년을 보낸다. 1명이 희생되고 3명의 끈질긴 귀소본능... 쿠바를 다시 탈출,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도시인 티화나까지 탈출하지만 다시 체포되어 정신병동에서 4년을 보내다 1명이 다시 희생된다.
엄한우, 엄민우 두 형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샌프란시스코 항에서 일본행 상선에 숨어들어 밀항에 성공한다. 처참한 동포의 실상을 임금께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인천항에 도착하나 이미 조선은 일본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 상태. 임금도 조선백성도 없는 일본땅이 되고 말았다.두사람은 멕시코 국적의 소유자였으므로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된다. 감옥에서 절규하는 그들에게 아무도 대답할 자가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작가의 글
몽골리안의 이동경로를 추적하기 위한 여행은 알래스카의 오지 '베슬'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MBC-TV 올림픽 특집극 「동방의 북소리』의 집필을 위한 취재여행이었다.
이 드라마의 두 가지 골격은 유라시아로부터 베링 해를 건너 아메리카대륙으로 흘러들어간 에스키모 인디언 그리고 남미의 인디오, 그리고 또 하나는 아주 근대사에서 한반도로부터 직접 남미로 건너간 조선인들의 후예 즉 멕시코 이민에 대한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동일한 종족의 두 개의 이동경로는 남미의 멕시코 유카탄반도에서 교차점올 이루고 있었으며 이곳이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마야문명의 발상지였다.
알래스카를 거쳐 미 대륙의 애리조나 주를 지나 곧장 멕시코에 도착한 것은 금년 5월 중순이었다. 멕시코시티는 고지대의 덕분으로 아주 쾌적한 날씨였다. 현지 유학생 통역을 대동하고 유카탄반도의 메리다로 향한 것이 바로 가뭄이 기승부리던 때였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뜨거운 열기에 심한 고문을 받기 시작했다. 여행의 중반이라 설사 끼까지 있어 불편스러움과 무더위 속의 멕시코의 고도 메리다는 아주 회색으로 보였다.
망고 열매가 땡볕에 짙은 향기로 익어가는 에드와르도 호세 교수의 집 정원에 앉아 애니깽 농장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동안 점차 나는 이상한 신음 소리를 듣는 환청에 빠졌다. 에드와르도 호세 교수는 마야대학에서 멕시코 문학을 강의하는 분으로 유일하게 조선인의 애니깽 농장 생활에 대한 자료를 갖고 있는 한국의 명예영사였다. 전형적인 멕시코인의 눈망울을 갖고 있는 호세 교수는 특히 조선 노동자들의 처우와 학대에 대하여 깊은 연민과 동정으로 관찰해 온 학자였다. 메리다 지방은 산이 전혀 없는 준 사막지대로서 끝없는 지평선에 돌담으로 경계를 이룬 애니깽 농장과 가끔씩 눈에 뜨이는 마야문명의 잔해들이 전부였다. 무더위가 지나쳐 두통이 나기 시작하였다. 메리다께 도착하면서부터 환청으로 울리던 그 신음소리는 애니깽 농장에 내려 흙먼지 속을 걷기 시작하면서 뚜렷한 상여소리로 확대되었다. 꼭 한국의 시골 돼지우릿간 같은 우리들이 애니깽 농장 초입에 늘어서 있었는데 그 안에 는 검은 털의 돼지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저것이 조선노동자들의 숙소였지” 호세교수는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애니깽은 메리다 지방의 특산물로서 밧줄과 카펫의 원료였는데, 용설란 모습의 이 선인장은 사람 키만큼의 크기에 가시가 아주 예리하고 딱딱하였다. “그것은 분명히 노예였어.”라고 호세교수는 단정하였다.
1,033명의 한국노예들은 1905년 4월 4일 인천항을 떠나 두 달 걸려 해상과 육로를 통해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남미 멕시코의 오지 메리다에 도착한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무모하고 처절한 긴 노예여행이었다. 나는 애니깽을 가공하는 허름한 공장의 문턱에서 80년 전 세계사의 기초지식도 전혀 없는 핫바지에 상투를 튼 조선 백성들이 어찌하여 여기까지 끌려왔을까 하는 그 불가사의한 의문으로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언어와 날씨, 생활 풍습이 전혀 다른 조선 백성들은 밤낮없이 가죽채찍과 애니깽 가시에 찔려 죽어갔다. 이들 1,033명의 조선 백성을 이 지옥으로 끌고 온 것은 존 메이어즈라는 영국 사람과 오바 가니찌라는 일본사람의 농간이었다. 세계열강들의 시달림을 받던 시대의 부산물로 생겨난 속죄양들이었던 것이다. 남편들과도 사별한 박삼례 할머니 자매는 메리다의 돌집에서 3세와 4세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1세들은 거의가 애니깽 농장에서 죽었고 2세부터는 각각 흩어져 멕시코시티와 티화나로 이주했으므로 몇 안 되는 조선 노예들의 후예들이었다. “고향은 동대문 근방이라고만 들었어.…” 두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어른들로부터 구전 받은 아리랑을 주 서툴게 불렀다. “일이 끝나면 아버지는 식구들을 얼싸안고 울었어.…” 병이 나면 움막에 죽을 때까지 가두어 두었고 탈출하다 잡힌 조선 사람들은 가죽채찍으로 매를 맞아 죽어갔던 것이다.
“어느 해인가 두 형제가 기적적으로 애니깽농장을 탈출하여 쿠바로 건너갔다가 거기서 붙잡혀 고생을 하다 다시 조선으로 건너갔다는 한의 전설이 있어…” “왜 탈출을 했다고 합니까요?” 나는 어떤 작은 실마리를 잡고자 재차 물었다. “조선의 임금님께 알리겠다고 해서 농장에서 몰래 푼돈을 거출해 줬 던 거야…” “그래서 조선의 임금님께 알렸답니까?” “그 후 소식은 모르겠어.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탔다는 얘기까지만 들었으니까…” 박삼례 할머니는 멕시코 핏줄이 역력한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희 나 라에서 올림픽을 해요 할머니…” 그러나 박삼례 할머니는 내 말을 들은 것인지 그것이 하나의 전설로 들렸든지 묵묵히 방안을 나는 파리를 쫓고 있을 뿐이었다. 멕시코에서 제7등 종족의 대우를 받았던 조선백성들, 농장에서 쫓겨 난 노예들은 거지들이 되어 유카탄반도 일대에서 구걸 행각을 하고 다녔다. 이들 중에는 열대병과 기아로 죽어 암매장된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메리다의 애니깽 농장의 취재가 끝나고 다시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아프리카의 케냐로 떠날 채비를 끝내고 우리는 번화가의 가리발디광장에서 멕시코의 독주 데킬라를 마시고 있었다. 수백 명의 민속 악사들이 단돈 5불이면 관광객들에게 연주와 노래를 해주는 곳이다. 늙은 멕시코 악사들은 제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올멕과 마야사와 아즈텍카 문명의 잔해를 덮고 외채와 빈곤과 일당 독재의 나라 백성들은 옛날의 영광을 노래로써 구걸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대들이 먼저 치른 올림픽을 우리가 물려받았지만 이제 다시는 애니깽 시대는 오지 않으리.… 그대들보다 더 긴 역사 속에서 이 백성이 찔린 그 애니깽 가시만으로도 이제는 족하리니 마야의 불가사의보다 더 큰 불가사의가 그 애니깽 가시에 찔린 백성들 손으로 이루는 시대가 올 것인즉…”
--- 1988. 애니깽 초연 프로그램 글 중에서 작가 김 상열.

 

 

 

 

 

 

 

 

 

〈멕시코 이민의 실태와 외교정책〉 케인 페터슨 (위스콘신 대학교수)
1905년 천여 명의 한국인이 멕시코로 이주되었다는 사실은, 숫자적인 면에서는 별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하나, 일본의 한국 지배와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 다룬 것은 멕시코에 대한 한국 이민문제와 일본의 제국주의 책동간의 제반 관계를 알아보려고 노력한 것이다 한국 노동자의 대 멕시코 송출계획은 1904년 8월 메이어즈 (J. G. Meyers) 라는 화란 독일계 영국인이 한국에 도착하면서 구체화되었다.
메이어즈는 멕시코 국적을 가진 유카탄반도에 있는 애니깽농장 소유주들의 대리인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농장 노동력을 중국, 일본 등지에서 구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아, 일본대륙 식민회사의 한국 지부장인 오바가니찌에게 한국인 노동자들을 멕시코로 송출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대부분 주민들은 멕시코 이민과 하와이 이민을 잘 구별치도 못했으며, 주로 1902년부터 시작되었던 하와이 이민만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멕시코 법은 미국과 달리 계약노동자의 입국을 금지하지 않았다. 이제 남아 있는 일은 이들 노동자들을 한국에서 멕시코로 수송하는 일인데 이를 위해서는 한국정부와 일본정부 고위충간에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었다.
이외에도 또 다른 문제가 메이어즈에게 제기되었으며 근본적으로 대 멕시코이민 송출 인원 모집 자체가 불법이라는 것이고 다만 하와이 이민 송출 허가가 미국 대표자에게나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민자들이 4월 4일 오전 인천항을 출항했을 때, 노예로 팔려간다는 소문이 드디어 한국정부에까지 퍼져, 수일 후 이하영 외무대신은 정부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한국 정부는 멕시코로 이민 간 사람들이 노예로 팔리고 노예취급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으며, 앞으로는 대량외국이민을 일체 금지한다.”
이러한 한국정부 측의 이민 송출 금지 조치 이외에도 다른 문제점이 대두 되었는 바, 이는 멕시코와 한국간의 외교관계가 없어, 한국 이주자들이 일단 멕시코에 도착한 후 이들을 보호해 줄 한국 외교관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멕시코 문제가 한국정부 고위층에 큰 관심사가 되었는데, 당시 한국 측에서 몰랐던 내용은 일본인들이 약 1개월 이상이나 이 문제에 관여했다는 사실이었다. 3월. 고무라 일본 외무대신은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영사와 워싱턴 주재 일본공사로부터 긴급전문을 받았는바, 내용은 1882년의 중국인 축출 법과 동일한 일본인 축출 법을 제정할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동경 소재 이민국 관리는 일본인들이 하와이에서 본토로 유입되는 이유가 한국인 노동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함으로써 점차 일본인 노동자들이 농장노동 독점권을 상실하기 때문이라고 인식했다. 소위 멕시코 문제는 일본으로 하여금 우선 하와이에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 하게 하고 동시에 워싱턴과 캘리포니아의 정책 결정면에서도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결국 일본의 외도는 멕시코뿐 아니라 하와이도 송출금지지역으로 포함하도록 조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멕시코 문제가 미 일 문제뿐 아니라 그 당시 일본에 대한 한국 독자 성 상실과정과 얽히고설키게 되었다. 일본 측의 전략은 한국정부의 금지조치 발표 2주 후에 분명하게 나타났는바 한국 외무성에서 작성한 적합한 규정을 거부해버렸던 것이다. 당시 거부에 대한 이무런 설명도 없었지만 새로운 규정 내용이 부적절하다고 계속 주장했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렇게 엄격한 제한조건을 강화하기 때문에 한국정부가 더 이상 규정작성을 하지 않을 것으로 일본은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 측은 한국 이민자들의 복지를 위해 인도적인 배려를 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대 하와이이민 유입을 막는 방법으로 썼다. 1905년 봄, 한국 입장은 외교관을 멕시코에 파견한다는 것도 어렵게 되었는바, 당시 러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던 일본이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외국에 주재하는 모든 사절을 소환하고 이들은 일본 관리와 대치하도록 권유했다. 이러한 압력으로 인해 한국 정부는 독자적인 대외정책을 수행할 수 없었으며 특히 1904년 일러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서명한 한일의정서에 근거해서 한국정부에 대해 동맹조약을 맺도록 강요하기로 했다.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실질적인 보호령이 되고 말았다. 전쟁의 진전추세에 따라 러시아의 영향력은 점점 쇠퇴하여 갔고, 일본은 한국 땅에서 마음대로 큰소리칠 수 있었는바 한국정부에 대해 향후 여하한 외교적 활동이나 조약체결, 외국인에 대한 특허제공 및 계약들에 대해서는 사전에 문의하도록 강요했다. 한국정부는 독자적으로 모든 문제를 처리할 수 없었으며, 이민문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1905년 여름, 이민문제는 한국이 독립국가로서의 주권을 상실하는 대표적인 케이스로 대두되었다. 한국정부 당국은, 이민재개를 위해서는 일본 당국 구미에 맞는 적절한 규정을 제정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1905년 6월 고위 외교 관리를 멕시코와 하와이에 파견하여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일본 은 더 이상 반대할 구실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특히 한국 측 입장은 대외문제에 대한 독립성올 되찾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외무부 대신(차관) 윤치호를 멕시코와 하와이에 파견할 대상 인원으로 설정했다. 비록 윤차관이 하와이 및 멕시코를 직접 방문하면서 실태조시를 완전히 한다 하더라도 멕시코 내의 사정은 계속 한국 이민문제에 대해서는 큰 장애가 되었다. 즉 일본의 많은 방해공작을 극복할 수는 없었다. 즉 윤차관의 멕시코 여행이 실현된다면 결국 새로운 이민규정 제정을 위한 기초 자료만 얻게 되는 것이 되고 일본의 외무성 당국이 만들어 놓은 멕시코 내 한국외교기능 대행권 문제에 이상을 초래할 위험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윤차관의 여행자금을 차단하면서 못 가게 막았으나, 윤차관은 기어이 멕시코로 떠날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은 일본의 신경을 자극했으며, 여행 중지를 위해 한국 재무성 내 일본인 고문으로 하여금 예산지출 승인을 거부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윤차관의 멕시코 출장계획은 완전 취소되었고 서울 귀환 명령을 받았다. 이로부터 3주 후에 한국이 일본의 보호령이 되고 말았다. 윤차관의 임무 실패와 보호령발표 둥으로 인하여 멕시코 내 한국인의 곤경 과 어려운 처지에 대해서는 관심의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이 논문은 1905년도 대 멕시코 이민문제와 관련한 외교적으로 미친 영향을 관찰해 보았다.
지금까지 분명한 것은 이들 한국인들이 그 당시 불법 모집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며,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 이민지들이 노예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믿어지는 일련의 자료들이 발견된 것이다. 한국정부로부터 우선 인도적인 견지에서 이민송출을 금지시켰으나, 이 기회를 이용한 일본정부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활용했다고 보여 진다.
이로써 멕시코 이민문제는 하와이와 캘리포니아 지방을 포함, 워싱턴에 대한 일본의 이해관계와 얽혀 있었을 뿐 아니라,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한국 독립성의 상실과도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 1988. 10. 프로그램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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