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의 시작은 어느 날 아비 앞에 죽음이 찾아오면서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아비에게 죽음의 신 오구는 운명은 거역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며 단 한 명이라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아비의 원대로 삶을 지속할 시간을 더 주겠노라 약속한다.
아비의 운명을 건 내기로 인해 바리는 세상으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설화 속 지옥여행을 이 시대의 현상으로 투영해 현실의 어두운 곳으로 바리의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행에서 바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삶의 끝에
내몰린 사람들이다. 눈 잃은 노파, 아내를 대신해 죽음을 택한 사형수, 아버지(중독자)를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창녀 등... 자신이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여긴 바리는
그들을 만나면서 어둠이라고 생각한 그들의 마음에서 진정한 희망을 본다.
죽음을 벗어나게 해주려는 바리의 노력은 뜻하지 않는 누이를 찾아 헤매는 소년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바리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고 괴로워한다.

바리는 시간을 돌려 스스로 소년의 목숨을 대신하는 선택을 한다. 바리의 죽음으로
소년이 다시 산거다. 오구는 죽음마저 이겨낸 바리의 희생에 죽음의 신으로 영원히
사느니 죽음의 굴레를 짊어지고 살더라도 인간으로 돌아가길 원하며 자신의 옷을 벗어
아비에게 준다. 유한성이 가진 가치를 아름답게 형상화한다는 것은 선택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인간에겐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고 그 선택은 세상을 탓하기 전
자신의 선택이 세상을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유한성을 지닌 인간의 선택이므로 그 가치는 더 높다 하겠다. 아비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신의 길로 들어선다. 바리의 몸속에 잉태되었던 새 생명은 세상으로 나와
어미의 품에 안기면서 어미의 힘(모성)의 구원과 만난다. 죽어서도 다시 사는 희생의
가치를 생명의 그것과 만나게 하고자 함이다. 이는 바리 설화의 원형에서 볼 수 있는
생명수를 형상화 한 부분이며 한국 전통 설화의 원형을 살려서 현대적 의미로 끌어오는
한 부분이라 하겠다. 태어나고 죽음에 이르는 짜여 진 각본 앞에선, 인간이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선택은 어떤 것일까. 그 선택 앞에 당신의 운명을 걸어 보겠는가?

이 작품은 무가 바리공주를 소재로 삼은 극이다. 희생의 상징인 바리를 정면으로
끌어내 죽음에 대항하여 살아온 인간의 자유의지와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관문 앞에서 어떤 죽음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자문을 필두로 극을 시작했다.
이는 어떤 죽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다시 말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죽어서도 다시 사는 길과
만나기 때문이다. 소재에서 현대 인간적 의미를 살려보고자 작가1, 2를 등장시켜
이 극이 현재 작가에 의해 형상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플롯을 설정했다. 하나 더
바리의 저승 여행을 세상 여행으로 끌어와 현재의 모습에서 지옥의 풍경을 만난다.
세상이 지옥과 같다면 그 지옥을 순화시키고 변화 시켜서 천국을 만들어야지,
아름다운 세계가 다른 곳에 다른 형태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 곳을
쫓아가는 것은 모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진화는 변화하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멸종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작가의 글- 김수미
난 죽을 것이다. 지금으로서 그것이 언제 일지 모를 뿐... 그 운명의 틀에서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운명과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동시에 충돌 시켜보고자 했다. (무모하기 그지없는 용기다. 인정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쓸 수 있는 것일까? 무엇을 듣고, 보고, 읽어 내기위해 부단히도 써내는 것일까?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작가들은 자신을 위해 작품을 쓴다. 다시 말해 자신을 위해 누군가의 운명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몸부림의 끝이 가져다 준 허망함 앞에 웃음으로 답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작은 울림으로 남아 주었으면 좋겠다. 선배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 이 극은 풀이의 극이라고 극을 만드는 배우를 풀어주고, 보는 관객을 풀어주고, 궁극적으로 작가를 풀어줄 거라고... 선배의 말대로 풀이의 연극이 되어주었으면 참으로 좋겠다. 소리 내 웃을 수 있는 힘을 위해... 3년의 기다림 끝에 극단 민예를 만나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기다림의 시간은 분명 풀린 것이다. 김성환이라는 연출을 만나 난 다시금 극장에 즐기러 나갈 수 있다. 참으로 신나는 일이다. 객석에 앉아 있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는 극을 즐기는 관객이다. 내 인생도 그 만큼의 거리를 두고 앉아 즐기며 보고 싶다. 그러면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는 서른 중반의 나의 자화상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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