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윤미현 '광주리를 이고 나가시네요, 또'

clint 2026. 7. 12. 05:18

 

 

집에 있는 온갖 식료품을 광주리와 유모차에 싣고 다니며 동네 독거노인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할머니. 동네사람들은 그 여자를 보고 ‘광주리 할머니’라

부른다. 할머니는 왜, 또 다시, 머리에 광주리를 이게 되었을까? 

광주리 할머니의 생일 잔칫날, 큰 아들 집에 모인 자식들과 며느리들은 서로

할머니를 모시지 않겠다며 생일상 앞에서 난투극을 벌인다. 집까지 다 물려준

마당에 자식들 싸움질과 며느리의 타박까지 견디며 살 순 없다고 생각한 할머니, 

모든 게 괘씸하다! 자식들에게 받은 설움을 복수할 방법을 찾는다. 

처음에는 작은 살림살이에만 손대던 할머니의 행동은 점점 대담해져 가고, 

미미는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는데...

 

 

 

광주리할머니는 그 누구보다 강인하다. 퇴직하고 막장드라마에 빠져 사는 아들, 

그를 대신해 현실을 걱정하는 며느리, 10년 째 취업도 못하고 방에만 틀어박힌

손녀 미미보다 더. 누구 하나 살기 힘든 이 세상, 광주리 할머니 자신의 앞길을

자신이 챙긴다. 누군가는 미처 눈길이 닿지 못했던 지독한 현실을 마주하고, 

또 누군가는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작품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등장인물과 배경 모두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다양한 군상들을

관찰하며 작품을 기획한 작가의 눈썰미가 돋보인다. 그러나 작품은 무기력하고

약한 인물들을 향해 동정과 연민의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소심하던 적극적이든

그들 나름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그런 그들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질문을 던지는 데 초점을 둔다. 

그리고 관객들은 깨닫게 된다. '희망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무엇보다 극복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대학원을 다니던 미미는 갑자기 모든 것을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미미에게는 말 못 할 사정이 있다. 집을 담보로 대출까지 받아 간 대학원에서

지도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다'며 오히려 미미를

내쫓았다. 사실 미미가 10년째 백수로 살아온 이유는 따로 있다. 일해도 월급이

적어 일을 안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미미의 부모도 어려운 사정이

있다. 50대 나이에 사실상 회사에서 잘린 아버지는 더는 일할 곳이 없다. 

방문판매라도 해보겠다며 전 직장동료를 찾아갔지만,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스스로 삶을 막장이라 외치는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과 등을 진다. 

미미의 어머니는 어떠한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값싼 식료품을 찾아다니는

것뿐,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작품 속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희망적인 인물이 바로 할머니다. 

남은 삶을 위해 집안의 물건을 팔아 돈을 모으는 할머니의 모습은 당혹스러울

만큼 현실적이다몰래 빼내 온 물건을 광주리에 싣고 동네 홀몸노인들을

대상으로 장사한다그것이 쓰다 남은 치약이건 조미료이건 상관이 없다

할머니는 소외된 이들에게 물건을 건네며 안부를 묻고 새로운 희망을 속삭인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굶는 연습을 하는 미미의 등을 밀어 무료 급식소에 줄을

서게도 한다그런 면에서 할머니의 광주리는 고된 삶 속에서도 악착같이

살고자 하는 몸부림인 동시에 희망의 메시지와 같다.

 

 

 

기대수명의 증가로 인한 고령화 시대의 불안을 넘어 초 고령화시대의 '하류 노인', 
'실버 파산'을 예견하는 사회적 징후들이 주제적 포커스를 노인문제에 맞췄다면,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 혹은 보편성의 미덕은 시대를 통찰하는 다양한 사고들이다. 
기대할 것 없는 현실에 등을 돌리고서 은둔형 히키코모리를 자처한 30대 후반의 대학원 
중퇴생 미미가 생생한 연극적 그림으로 보여주는 오늘의 청년실업 문제, 그와 관련된 
교수의 성추행과 주변의 갑질들, 50대 가장의 조기명퇴와 그로 인한 부적응의 실체적 진상, 
경제적 불안에 대한 강박관념이 조장한 '땡 처리' 물품 사재기 등, 사회적 안전망의 허술한 
구멍을 뚫고 튕겨져 나온 동시대의 총체적 불안을 주목하는 테마들의 공존이 그것이다. 
사물의 축적 이 인간의 공허를 대치하는 악몽의 현실을 여과 없이, 또한 두려움 없이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희극적 장치들은 관객을 극의 안팎으로 즐겁게 유인하는데 성공한다. 
(국립극단 공연, 윤미현 작, 최용훈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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