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선의 데뷔작 희곡이 <호동>이다. 이 작품은 1986년 월간 "문학사상"의 신인발굴작품으로 선정되었으며, 문예진흥원의 공연예술 창작지원을 받아 <나는 어이 돌이 되지 못하고>라는 제목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이 작품은 호동설화에서 왕비의 역할에 주목하여 낙랑국의 멸망을 왕비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재구성하였기에 여성의 역할을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시키지 않고 남성 중심의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을 드러내는 역할로 부여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화극은 당대 연극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하였다. 여타의 공연들이 동시대의 문제에 대한 시사적 고발, 과거사의 재현, 이데올로기의 선전, 즉흥적인 언어와 몸짓의 유희, 감각적인 오락, 무대기교나 메커니즘의 실험 위주 등에 치우치고 함몰되어 있는 데 대하여 근본적인 반성의 차원에서 출발한 것이다. 연극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던 신성한 의식성과 진실한 영혼의 탐구 및 삶의 본질성과 반복성을 오늘의 예술로서 새롭게 되살리고 창출시켜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하게 고대적 의식에로의 회귀나 전통의 계승을 목적으로 한 연극이 아니라, 연극을 통해서 현실적 삶과 문화양식들이 지닌 근원성을 새롭게 해석해 보고자 하는 연극이다. 아울러 인간과 사회와 역사가 지닌 문화적 정체성과 신화적 원형성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전위적 이고 창조적인 연극을 통칭한다. 역사적인 소재에 근거한 작품의 경우에도, 역사극으로 분류하지 않고, 신화극에 포함시킨 것은 이런 까닭이다.<나는 어이 돌이 되지 못하고>(1986. 11)는 호동의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우리 현대희곡사에서 왕자 호동의 이야기는 훌륭한 소재로서 수차에 걸쳐 극화된 바 있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호동의 의붓 어미인 원비가 호동이 왕위를 계승할까 두려워 왕에게 모함하였는데, 이에 그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고자 자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놓고 작가는 나름의 관점에서 호동설화를 재해석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 호동의 죽음을 가져오게 한 요인은 원비의 호동에 관한 사랑과 증오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스의 운명비극<히폴리토스>(BC 428) 같은 분위기가 감도는 이 작품에서 관중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재현을 목격하게 된다. 작가는 여성적인 섬세함과 고양된 언어능력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우아함과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사를 구사 하여 주목을 끈다. 이에 더해 이 작품의 공연이 배우 강계식(1917~ 2000)의 고희기념 공연을 겸하여 이루어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의의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전체적으로 적지 않은 결함과 미숙함을 노출하고 있다.
먼저, 등장인물의 신분이나 극중 역할에 관계없이 대부분 장황하게 대사를 늘어놓음으로써 속도가 지연되고 지리한 느낌을 주었다. 아울러 현실감이 뒤지는 관념어와 독백의 삽입은 극적인 행동성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행동의 필연적 발전 대신 감정의 과잉이 두드러졌고, 이는 극행동의 과장을 낳아 비극적인 긴장미를 파괴하는 결과를 빚었다. 생동감을 주는 왕비의 성격에 비하여 호동의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남성으로 설정된 점 또한 문제였다.
호동왕자의 이야기는 낙랑공주와의 비련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낭락의 공주는 호동과의 사랑때문에 나라를 지켜주던 자명고를 찢고 아버지인 왕으로부터 죽음을 당한다. 자명고가 없어진 낙랑을 정벌한 호동은 공주의 죽음을 슬퍼하고….
삼국사기의 기록은 호동이 낙랑을 정벌한 그해 11월에 자살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왜 자살하는가? 서출왕자인 호동을 두려워한 왕비가 왕에게 참소하여 고민끝에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참소의 내용이 특이하다.
왕비는 『호동이 나를 예로써 대우하지 아니하니 아마도 음란하려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왕에게 말하고 있다.
7일부터 문예회관에서 막을 올리는 연극『나는 어이 돌이 되지 못하고』(윤정선작·주요철연출)는 이러한 기술에 근거하여 호동과 왕비사이의 관계에서 빚어진 비극을 구성했다. 연극은 한 여인의 질투에서 빚어진 비극, 나아가서는 에디퍼스 콤플렉스에 의한 불륜의 비극으로까지 그 각도를 넓힌다. 작가 윤정선씨는 이 작품을 통해 본능·야욕의 엉클어짐 속에서 순수함과 함께 통곡과 좌절, 처절한 파국을 그려내어 역사적 설화를 새로이 해석했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기영 '흐르지 않는 강의 전설' (1) | 2015.11.14 |
---|---|
조일도 '버리고 간 노래' (1) | 2015.11.14 |
김용을 '동치미' (1) | 2015.11.14 |
윤영선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1) | 2015.11.14 |
이근삼 '오코치의 화려한 가출' (1) | 2015.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