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선 작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사팔뜨기 선문답〉으로부터 시작하여 〈떠벌이 우리 아버지 암에 걸리셨네.〉, 〈G코드의 탈출〉, 〈키스〉에 이르기까지 늘 그렇듯 작가 개인의 세상에 대한 집요한 사유를 토대로 관객들을 인간 내지 인간 현실에 대하여 끊임없이 사유하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관념 극이다. 여기서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박은 채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본질'이다. 반면에 정처 없이 떠도는 인간 군상은 그에 이르지 못 하는 부조리하고 불안정한 '실존' 또는 '현실' 이다. 실존의 대표적 상징은 식욕, 성욕, 소유욕 등 인간의 욕심이다. 그 욕심 때문에 인간은 나무로 대표되는 자연을 파괴하고 문명을 세웠으나. 과연 그로써 이르게 되는 최종 결과는 무엇이냐는 문제, 즉 인간의 궁극적 정체성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대단히 강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섞여 있지만 산문적인 부분이 전혀 없는 대단히 시적인 작품인데, 설명이 없는 만큼, 형상화 과정의 다양한 해석은 물론이고, 최종 수용자인 관객들도 각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 답으로써 작가가 남겨놓은 여백을 채우는 일조의 참여적 매카니즘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사회적 제 관계 속에서는 결코 발화될 수 없는 목소리(voice)를 기본으로 하여 극을 구성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사회적 목소리'와 구별하여 '실존적 목소리'로 부를 수 있겠다.
이 극에서 주인공인 남자와 여자는 자기내면 속에 갇힌 채 만남을 유지해오고 있는 관계이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본인들마저도 명확히 규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서로 간에 불필요한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남자와 여자의 내면은 독백에 가까운 운문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행위 이후에 그들에게 떠오르는 삶의 편린에 대한 후회, 아쉬움, 갈망, 자기 행위의 의미 등에 대한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대사가 시적운율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의 내면을 함께 사유할 수 있도록 한 것이라면, 행동을 유발시키는 사회적 언어는 산문을 사용하여 극에 박진감을 더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행동의 언어는 산문으로 사유과 정은 운문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자는 자기 삶에 지쳐있다. 모든 것에 적극적이지 못하며 경제적으로 힘들다. (작품에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여자는 가족 없이 자기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여자의 운문적인 독백에서 드러나듯 그녀는 '부셔지기 쉬운' 영혼을 가지고 있다. 남자가 여자에 비해 강하게 보이지만 그 역시 삶에 부대끼고 있다. 자기가 만들고 싶은 영화는 성공하지 못하고 제작자는 그의 재주를 상업적인 목적에 이용하려 한다. 물론 그들의 내면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각 에피소드에서 보듯 몸을 가진 인간의 욕망은 노골적이고 직접적이고 그만큼 치열하다. 식욕과 성욕, 소유욕 등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디론가 끊임없이 헤매고 투쟁하는 인간의 몸. 하지만 자기 삶이 정당하고 가치 있는 것인가에 대해 회의하는 몸. 반면 나무는 동물인 인간과는 달리 보다 수동적이고 뿌리를 통해 주 자양분을 흙에서 취하고 있다. 나무는 자기가 서있는 바로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또한 나무는 자기 생존을 위해 무자비하고 분별없이 살육하지 않으며 하늘을 향한 꿈을 꾸며 날개 달린 새들은 그 위에 집을 짓는다.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는 인간의 몸(body)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희구 대상으로서의 나무를 작품전체에 편재시켜 배음(背音)으로 작용하도록 했다.
"나무는 신발가게를 찾아가지 않는다." 는 우리 현대인의 삶을 사회적 구도 속에서 명료하게 제시하여 단일한 주제를 드러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관객이 자기 개인의 삶과 우리 전체의 삶에 대해 되돌아 볼 수 있는 사유와 명상의 연극이다
[작품 줄거리]
여자의 방. 걸신들린 사람처럼 밥통 채 밥을 퍼먹는 여자.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방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만나고 말을 하고 웃고 함께 식사를 하는 등 구체적 행위를 해야 하는 몸, 여자는 인간의 그런 몸을 부정하고 싶다. 만약 나무가 된다면 지상에 뿌리를 내린 채 부동의 자세로 견딜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여자는 죽음의 연습을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를 한다. 전화선을 타고 들리는 그녀의 음성은 무성의할 정도로 활기가 없다. 전화를 끊고 나자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몸으로 스며들다가 어느 순간 밖으로 사라져 버린다. 일종의 부재감이다.
여자가 밖으로 나가 공원을 지나갈 때 벤치에서 자다 깨어난 거지와 의미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미친 여자를 본다. 거지는 도시 공원의 나무와 나무 너머 빌딩을 보며 달관한 듯 일종의 시를 읊어대고 미친 여자는 거지에게 엉뚱한 질문을 한다. 그들의 말을 들은 여자는 자기는 도대체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반문한다. 해부학 강의시간에 여자는 죽은 자의 몸을 효과적으로 절개하는 방법에 대해 듣는다. 그것은 죽은 자의 몸, 모든 욕망이 제거된 몸에 불과하다. 하지만 살아 있는 몸은 욕망의 덩어리이다. 여자는 자기 몸의 각 부분과 그것의 기능 등에 대해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는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 옆 테이블의 어느 일가족들이 유쾌하고 적극적으로 식사하며 치열하고 노골적으로 식욕과 성욕과 소유욕 등을 음식 먹는 것과 연관시켜 얘기한다. 그들을 지켜보며 여자는 인간의 먹는 행위, 그리고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무자비하게 동물들을 죽이고 있다는 죄의식에 사로잡힌다. 남자와 여자는 여관에 간다. 그들의 몸은 서로를 강하게 원한다. 몸은 몸을 그리워하고 그들의 몸은 서로 뒤섞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간에 낯선 상태로 남아 있다. 여자는 욕조에서 수은이 벗겨진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자는 그런 자기와 남자에게 연민 감을 느끼지만 '알 수 없는 여자가 알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견딜 수가 없어서' 여관을 떠난다. 한편,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여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져 있는 남자는 제작자의 훈계를 듣는다. 제작자는 남자에게 현대인이 원하는 것을 영화가 제공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결국 남자는 제작자가 원하는 영화를 만들 것을 약속한다. 여자는 남자의 그런 모습을 보고 연민과 함께 분노를 느낀다. 비로소 여자는 자기가 얼마나 그 남자에게 의지하고 그를 믿고 사랑했던가를 깨닫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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