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이근삼 '오코치의 화려한 가출'

clint 2015. 11. 13. 20:19

 

 

 

평생을 하나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을 만드는 일이든지 아니면 무엇을 연구하는 일이던지. 우리는 그들을 '장인' 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장인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 '오치웅' 이라는 평생을 배구를 위해 살아온 남자가 있다. 그의 나이 현재 55. 한때 국가대표 선수로 까지 뽑혔던 인물이지만 더 이상 키가 크게 자라지 않아 고등학교 배구 코치로 27년 간 재직해 오고 있는 인물이다. 이런 그의 화려한 가출이 극 제목이다.
오치웅 그의 생활은 항상 일정하다. 일주일 내내 고등학교 배구 선수들의 합숙소에 함께 있다가 토요일에 집으로 귀가하는 것.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그가 박봉에 시달리며 그 일을 하긴 쉽진 않지만 그는 배구에 대한 열정하나만으로 묵묵히 그 일을 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사장은 동창회의 압력에 못 이겨 그를 해고하기에 이르고...
98년부터 IMF 한파가 몰아치면서 평생 한 직장에서 한가지 일만 하며 살아온 우리의 많은 가장들이 정리해고 라는 이름 앞에 직장을 떠나야 했다. 한 평생 한가지 일만 해온 그들이 나이 들어 그곳을 그만두어야 할 때 심정이 어떨까? 본인이 아니면 차마 느끼기 힘들 것이다. 특히 평생 운동을 해왔고 자존심과 자부심 하나로 사는 '오치웅' 같은 인물은 더하다. 그는 체육 협회장으로 일하고 있는 옛친구의 힘으로 인해 감독을 제의 받지만 자존심 하나로 거절한다. 그의 집 역시 넉넉지 못한 형편에 그의 아내는 남편 몰래 파출부로 일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 하나로 모든 일을 거절하는 그는 현실적인 딸과 마찰을 일으킨다. 55세란 나이에 가족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책임을 느끼는 그 나이에 그는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킨다. 때론 외골수에 고집불통으로 느껴지는 그이지만 배구에 대한 열정하나로 끝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며 후배가 못이룬 낙도 어린이 배구 코치를 맡기로 하고 또 가출한 것이다.
故 이근삼 선생의 이 작품 '오코치의 화려한 가출' 역시 우리 옆에 바로 살고 있는 듯한 인물들의 면면을 따뜻하면서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억지스럽지 않게 잘 표현해 낸 수작이라 하겠다.

 

 

 

이근삼은 첫 희곡작품 「원고지」(1960) 이후 최근(2001)에 공연된 「화려한 家出」에 이르기까지 40여년 동안 무려 오십여편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한국연극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확장한 극작가이다.

「화려한 家出」은 사십여년 간의 길고 다채로운 모험의 장정 끝에 이근삼이 발견한 인생의 소박하고 정직한 모습이다. 한국배구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사명감 속에서 27년간 청소년 배구팀 코치라는 외길 인생을 살아온 55세의 배구코치 오치웅은 어느날 명퇴를 당한다. 좌절과 허탈감 속에서 헤매던 그는 처세술 좋은 친구가 마련해준 일자리를 마다하고, 외딴 섬의 무보수 배구코치가 되기 위해 서울을 떠난다. 그것은 한편 가난한 낙도의 어린이들을 배구선수로 키우려다가 요절한 제자의 꿈을 대신 실현하려는 뜻깊은 삶이라고 자위하면서……

 

 

 


이 작품의 배경은 소위 시장경제 논리로 사회가 급변하면서 사나워진 오늘의 한국이다. 그러한 급류에도 불구하고 잔잔한 가족애에 힘입어 자신의 생이 초라하지만 '지도자의 길'이라고 여기고 있는 오코치는 소시민인 우리 각자이다. 우리도 오코치처럼 알고 있다. 우리가 바득바득 의미를 부여하는 이 현실이 어쩌면 환상일 수도 있음을……, 오코치가 결코 '화려한' 지도자가 아닌 것처럼, 우리 역시 '화려한' 존재가 아니고 그저 '그렇고 그런 존재'일 수도 있음을…… 그런데 어느 날, 늙음과 함께 더 이상 유용성이 없어졌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퇴출당한다면……?
오코치는 퇴출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자기비하의 넋두리를 늘어놓는 대신 자신의 평생 업인 배구코치 생활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 비록 그것이 '안락한 방'인 가정과 사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의 가난하고 고립된 삶이라 할지라도. 오코치의 선택은 자신의 생의 의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그의 자존심은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을 직시하면서 사소한 일상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에 다름 아니다. 실패한 인생임을 알면서 다시 끌어안는 삶, 허탈감에 몸부림치면서도 자기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꿋꿋함, 오코치의 이러한 모습은 자신을 속이고 현실에 야합하거나 모든 일을 너무 쉽사리 포기하는 현대인에게는 낯설지만 동시에 진솔한 어떤 것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런데 막이 내리기 직전, 그의 용기있는 '화려한 가출'에 박수를 보내려는 관객에게 낙도의 바위에 앉아 있던 오코치가 문득 고백한다. "인생은 사기이며, 자신은 비인기 운동종목처럼 '비인기 인간'이다. 사실, 인간관계는 진실을 알면 유지되지 않는다" 라고. 그리고 오히려 관객에게 묻는다. 자신이 이 섬에 온 이유가 진정 "죽은 제자의 꿈을 대신 실현하기 위함이던가?" 여기서 이근삼 특유의 아이러니와 페이소스가 배어 나온다. 행간에 숨겨진 작가의 말, 그것은 인간이란 위대하지도 왜소하지도 않은 존재이며, 인생이란 행복한 것만도 불행한 것만도 아니라는 것, 인간은 실패와 성공, 절망과 희망을 양쪽 겨드랑이에 낀 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 게다. 「화려한 家出」은 눈부신 기교나 기발한 아이디어 대신에 인간과 생에 대한 가식없는 정직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들에게 자신과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원론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