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노배우 황포는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살면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배우로서의 삶에 불안을 느낀다. 저승사자를 꿈속에서 만난 이후로 신경이 예민해진 황포는 출연할 공연에서 단역으로 교체되자 그 절망감에 자살을 결심한다. 황포가 구차한 삶을 비웃었던 장애인부부가 아이를 낳게 되고, 애지중지하던 고양이를되찾게 되자 황포는 연극과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데....
원로배우 장민호 선생의 배우인생 50년을 재조명하는 자서전적 창작극이다. 장민호 선생과 돈독한 우정을 쌓아 온 원로 극작가 이근삼 선생이 장민호 선생과의 대담을 토대로 쓴 작품으로, 연기만을 천직으로 살아 온 70대 노배우의 이야기이다. 아내와 사별한 후 외동딸마저 미국으로 시집을 가고 노후를 대비하여 마련한 돈을 사기로 날리게 된 노배우의 절망과 인생에 대한 희망을 그린 작품. 무엇보다 장민호와 이근삼이라는 연극계의 원로가 우정을 과시하며 만나 원숙한 작품을 내놓았다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며, 윤주상, 김재건, 김종구 등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들의 출연이 눈에 띈다.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기에」는 「어떤 老배우의 마지막 연기」가 무명의 가난한 노배우를 다루었다면 이 작품은
배우로서 대성한 어떤 노배우의 말년을 그린 작품이다. 실은 이 작품의 구상은 r어떤 노배우……」의 공연이 끝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이 작품을 본 張民虎 선생은 이런 작품이면 나도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장 선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작품을 쓰고 싶었다. 그만큼 화려하고 긴 연기생활을 했으니 후세에 남길 만한 경험담이나 자서전 같은 것을 써 글로 남겨야하지 않는가, 라는 나의 말에 그는 늘 글재주가 없어서 또는 배우는 무대에서 말하면 족하다는 말을 되풀이 해왔다. 그러나 장 선생 특유의 발성과 거의 본능적인 무대 감각 그리고 연습을 대하는 그 진지한 태도를 그냥 묻혀버리는 것이 아쉬워, 그럼 내가 장 선생을 모델로 해서 쓸 테니 그리 아시오 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장 선생은 이젠 기력이 떨어져서, 늙어서 하시며 사양을 했지만 그래도 배우란 할 수 없는 것, 만나면 잘 되갑니까? 하고 묻곤 했다. 본래는 장 선생의 자서전 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해 보고 싶었는데 자기를 추켜올리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라 초고를 읽은 장 선생은 제발 이 부분은 빼달라며 늘 작품 속의 자기 자세를 낮추었다. 이 작품에는 장 선생이 평소 좋아하던 고전희곡의 대사도 많이 나온다. 작품의 줄거리와 그런 독백이 자연스럽게 융합되게 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공연 을 통해 장 선생의 독백 솜씨도 관객에게 알리고 싶었다. 이 작품 역시 장 선생이 처리할 대사가 많아 처음 이 작품을 읽은 장 선생은 아찔했으며 늙은이가 이렇게 긴 대사를…” 하고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역시 장 선생이다. 일단 맡고 보니 같이 출연할 김종구, 윤주상, 김재건군을 비롯한 출연진이 장 선생의 그 정열과 젊음에 당황할 지경이다. 연출은 오래전에 「카라마조프의 형제」 공연 때 장 선생을 모셨던 김영수군이 맡아 고생중이다. 유명이건 무명이건 사람이 인생 말년에 느끼는 감정에는 차이가 없다. 이 작품은 한때 무대를 독점하던 명배우의 말년의 심정을 현실과 환상을 뒤섞으며 나타내 보고자 한 내용이다. 몸은 자꾸 늙어가고, 정신은 어디 두고 온 듯 깜빡하기 일쑤이고, 귀는 어두워지고, 모아 놓은 돈은 투자 회사의 부도로 날아가고, 기르던 고양이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평생을 바쳐 해온 일인 연극에서는 밀려나고, 그래서 불안하고 외롭고 초조하고 노엽기만 하다. 주위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는 것도 싫다. 외동딸은 미국에 살고 있고,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자식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고, 연기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아서 미국에 오라는 딸의 청도 물리치고 홀로 살아가고 있지만 힘들기만 하다. 과거의 명성은 삭막한 현실에 대한 탄식과 아쉬움에 묻혀 빛바랜 채로 남아 있다. 70대 중반의 노배우 황포 선생은 끊임없이 죽음의 유혹을 느낀다. 원로 배우 장민호 선생의 자서전적 연극으로 지난 해 공연에서부터 눈길을 끈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가 다시 무대에 올랐다. 40여 년간 연극계에서 함께 해온 원로 극작가 이근삼 선생의 헌정 희곡이어서 연극은 그대로 배우 장민호의 이야기로 읽힌다.

망령들이 눈에 보이면서 끊임없이 죽음의 유혹을 느끼던 황포 선생은 문득 주위에 천사같은 착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교수로 불리는 이웃의 퇴직 변호사, 딸처럼 드나드는 송 순경과 연극 배우 낙희, 아내는 말하지 못하고 남편은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 부부의 모습이 결국 황포 선생의 마음을 바꿔 놓는다. 황포 선생은 '인생이 뭔지 알면 내가 하나님이게?'하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욕심 부리지 않고 엄살떨지 않고 매일 매일 밥 먹고 술 마시며 열심히 사람 만나고 열심히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며 노년기의 방황을 마무리한다. 한 길로만 걸어온 인생은 아름답다. 80년 인생에 50년 넘게 한 가지만 하면서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면 인생에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런데도 장민호의 분신인 황포 선생은 깊은 회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러고 보면 노년기란 얼마나 힘센 장수인가. 무대 위에서 78세의 배우 장민호 선생은 진짜였다. 배우로 연기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78년 인생을 고스란히 그 몸짓에, 표정에, 말에 담고 있어서 내가 앉아 있는 객석이 아닌 무대 위가 진짜였다.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장민호 선생은 자신의 연극 인생을 총정리하는 작품이어서 '목숨 걸고' 한다고 말했다. 80을 눈 앞에 둔 나이에 '목숨 걸고' 할 일이 있는 노배우. 정말 멋있다.
그래서 육체는 쇠약해지고, 세상은 나를 잊어가고, 주위 사람들은 연민으로 대하는 노년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관용과 애정이라고, 나는 그것이 부족했고, 늘 나만 생각해 왔다고 깨닫고 후회하는 황포 선생은 다름 아닌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노년기의 분신이었다. 호기심 많고 활기넘치는 변호사 친구(별명이 노교수)와의 우정을 들여다 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이다. 황포 선생처럼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치매 증세가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교수도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친구를 염려하고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노교수의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 그 역시 노년의 한 얼굴이다. "연극계의 거목"이라는 친구의 말에 황포 선생은 "거목(巨木)이 아니라 고목(古木)"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거목은 곧 고목이 아니겠는가. 오래 되지 않은 나무가 어찌 그 가지와 잎으로 커다랗고 넓은 그늘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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