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째 대머리 연구에 심취해 있는 고박사는 동경 유학 때 열렬한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안여사와의 사이에 세 딸과 막내 아들을 두고 있다. 첫째 딸 숙희는 연애결혼을 했으나, 첫날 밤 소박을 맞고 귀신이 나온다는 2층에 홀로 갇혀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 둘째 딸 문희 또한 막냉아들의 과외선생인 소설가 지망생과 결혼하겠다 하여 고민이 이만 저만이 아니다.
첫째 딸의 연애결혼을 은근히 지지했던 고박사는 안여사의 압박에 못 이겨 둘째 딸 문희는 중매결혼을 시키려 하는데...
문희가 맞선을 거부하고 2층으로 올라가 버리는 바람에 셋째 딸 명희가 대타로 맞선 자리에 나서고...
왈패기질이 다분한 명희는 무관심한 맞선 남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데...
국립극장 제1회 장편희곡 모집에 당선되었던 작품인 연극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가 1956년, 그때의 향수를 가득 품고 무대에 올랐다. 무대 중앙에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과 단출한 가구들이 몇 개 놓여있을 뿐이다. 고박사네 딸들은 자유 연애을 원한다고는 하지만 요즘 세대처럼 멋대로 행동하거나 반항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귀신이 나온다는 2층에 틀어박혀 더욱 몸을 움츠린다. 그 과정에서 각성하는 것은 연애결혼 1세대 고박사 부부다.
고박사 부부의 세 딸들은 모두 자유 연애와 결혼을 원한다.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가 첫 날밤에 소박을 맞은 큰딸, 꽁생원 과외선생과의 결혼을 불허받은 둘째딸, 마초기질 다분한 고지식한 남자 영수와 매너 좋은 엘리트 회사원 완섭 사이에서 연애상대를 찾는 셋째. 그러나 작품은 단순히 셋째의 사랑 찾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명희가 보여주는 자유연애 쟁취기는 문희와 숙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은 고박사 부부의 왈츠로 끝맺음 되면서 노년의 커플에게로 완전히 전위된다. 자유연애가 불가한 시대적 상황이 아니라도, 양장 차림의 딸들과 한복을 차려입은 할아버지가 공존하는 모습,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큰일 이야요”같은 독특한 어법이 관객들로 하여금 시대감을 느끼게 한다.
흑백영화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야요, ~테야요 어미를 현대식으로 바꾸지 않고 고집스레 사용했지만 작품을 감상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오히려 특유의 화법이 신선함을 더한다.
큰 딸 숙희는 기괴함 그 자체다. 블랙의상으로 전신을 감싸고 좀비처럼 벽을 더듬으며 돌아다닌다. 열렬히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명희와 영수의 뒤에서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는 그녀의 표정은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하다. 떠났던 남편이 돌아왔을 땐 갑작스레 기쁨의 차차차를 추며 회포를 푼다. 막내 딸 명희가 괴성에 가까운 요들송을 부르거나 암전마다 ‘뽕짝’이 쿵짝거릴 때는 관객들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다. 고전적인 이야기에 음산한 캐릭터와 생뚱맞은 장면을 첨가한 것이 웃음을 염두에 둔 장치인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지는 다소 헛갈린다.
하유상 작가는 그 당시 연애 결혼한 부모가 자식들의 연애 결혼을 반대하는 모순적 상황이 앞으로도 무한히 되풀이 되리라 생각하며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21세기에 와서 이 에피소드는 크게 어필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딸들의 연인〉은 1957년에 중앙국립극장의 제 1회 장막극 공모로 등단한 작품이다. 그 해 11월에 국립극단 「신협」에 의해 국립극장에서 공연될 때 의 '작가의 말' 은 다음과 같다.
우리 동양인은 서양인에 비하여 말에 등한한 것 같다. 말이 지닌 뉘앙스 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오셀로〉에서 그 세련된 말의 묘미를 빼면 단지 수건 하나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를 의심한 나머지 죽이게까지 되는 멜로드라마가 아니겠는가! 나는 언제나 반 뷜의 이 말이 잊어 지지 않는다.
•인과(因果)를 캐라고 젊은 얼굴로 철학 선생은 말하지만 그건 말, 말, 말..., '
나는 늘 종횡무진의 아이러니와 위트에 체호프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페이소스까지도 지닌 유머러스한 작품을 써보자는 시퉁머리 터진 생각을 했다.
모르나르가 '관객'을 이렇게 말했다. '죄인은 지정된 시간에 지금까지
하던 일을 중지당하고 큰 회장으로 끌려간다. 그리고 그는 어둠속에서 숨 막히듯 갑갑하게 거의 3시간이나 비좁은 좌석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동안 그는 다음 사항을 엄금 당한다.
1. 나가는 것
2. 일어서는 것
3. 움직이는 것
4. 휘둘러보는 것
5. 이야기하는 것
6. 코푸는 것......
(이 사항은 무려 31항목까지 있지만 번잡하니 이쯤에서 생략하겠다)'
이렇듯 불쌍한(?) 관객에게 연극을 즐기지 못하게 한다는 건 너무너무 자비한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관객에게 하품을 시키고 싶지 않다. 나는 설교가가 아니니까. 나는 시인이고 싶다.
나는 이 작품의 작의를 이렇게 썼다.
부모의 대와 자녀의 대의 충돌은 언제나 존재한다. 서로 자기 입장에서 만의 일방적인 해석은 의견 차이를 가져온다. 자녀는 부모의 생각이 낡았다고 원망하고, 부모는 또한 자녀의 생각이 지나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부모도 과거에는 자녀였었고 자녀도 미래에는 부모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에 매이지 않고 이 두 대는 접근할 수 없는 평행선일까!
나는 이 문제를 연애와 결혼을 통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연애와 결혼의 과정을 밟아서 자녀는 부모가 된다. 그러나 자녀는 연애의 자유를 구가하고 부모는 연애의 자유를 경계한다. 그럼 어느 편이 옳은 것 인가? 여기에는 옳고, 그르고의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자녀가 자녀로서의 고뇌가 있듯이 또한 부모는 부모로서의 번민이 있는 것이다.
여기 어느 부모가 있다. 그들은 연애결혼을 하기 위하여 부모와 투쟁한 과거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막상 부모가 돼서 자녀들의 연애에 접했을 때 반대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꾸짖을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그만한 사유와 애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자녀들의 의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치 과거의 자기들 부모처럼… 자녀들도 미래에 또 그럴지도 모른다. 마치 현재의 자기들 부모처럼… 또 그 자녀들의 자녀들도…….
나는 무한히 되풀이될 이런 과정에 있는 그들을 풍자하고 싶다. 거기에는 너무나 모순당착이 많으므로… 그러나 보다 더 자녀들에게 편들고 싶다. 그들은 새로운 세대니까. 그들의 이런 반발이 있음으로 해서 동철을 되풀이하면서도 우리 인류는 조금씩 진보의 과정을 밟게 되 는 것이다. 어쨌든 부모가 보다 더 자녀들을 이해하기에 애써야 할 것이 다. 왜냐 하면 부모는 이미 자녀의 경험자니까. 자녀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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