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백하룡 '이날 이때 이즈음에'

clint 2015. 11. 13. 17:37

 

 

 

의자왕의 애첩 은고는 첫 등장부터 요망하다. 세상 권력 다 쥔 왕 옆에서 무엇이 아쉬운지 힘없는 화가를 건드린다. 백제 멸망이 다가와도 은고는 왕의 눈과 귀를 멀게 하며 왕의 행위를 농락한다. 장돌뱅이는 갈급하다. 15년째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를 찾아 전국을 헤맸다. 우연히 다시 만난 여자는 나쁜 남자와 함께다. 하지만 그녀는 장돌뱅이와 있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며 다시 떠난다. 알콩달콩 신혼 부부. 한 남자는 불안하다. 살인자였던 과거를 부인이 알게 될까 염려스럽다. 지금의 행복을 뺏긴다면 남자는 끝이다.

 

1초, 2초, 3초, 4초… 매초, 매분, 매시간이 칼같이 사라진다. 그렇게 시간이라는 것은 언제나 정확하고 공평하게 똑같이 흘러간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며 달이 뜨고 달이 진다. 그 모든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이 끼어들 공간은 없다. 인간은 어떤 시간에도 해를 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때로 어떤 시간은 너무나 길고 어떤 시간은 너무나 짧다. 바다가 물을 묶었다 풀어내는 하루의 시간일지라도 하염없는 기다림으로 인해 영원보다 길고 긴 어느 날로 기억된다. 나무가 꽃을 떨어내고 열매를 베어 무는 일 년의 시간일지라도 달콤하고 촉촉하여 언제 지나갔는지 알 수 없는 찰나의 순간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렇게 인간의 기억은 시간을 위해하고 배반하는 시간 바깥의 시간으로 분한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시간 속의 시간을, 시간사이의 시간을. 시간 너머의 시간을 인간의 영혼은 그토록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을는지도...


〈이날 이때 이즈음에〉는 '경계성 인격 장애'를 알고 있던 한 인물의 실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연극으로 멸망기 백제의 왕실, 일제강점기 남해 부둣가 주막, 현재 서울의 외곽 연립주택 옥탑 방에서 벌어지는 각기 다른 에피소드가 어우러져 확신할 수 없는 순환구조 - 마치 인생과 같은 - 를 보여준다.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의 완전해지고자 하는 욕망과 그 욕망의 허망함은 더할 수 없는 연민을 그러모으며 무대와 무대 아닌 곳의 시간을 합쳐낸다. 무대 위의 시간을 보며 관객들은 그 속에 투입된다. 이제 그 시간은 무대를 넘고, 현재를 넘고, 역사를 넘는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우주 속을 떠도는 헐겁고 불쌍한 한 명의 인생으로 귀결된다.

 

 

 

 

서러운 비린내가 나는 사내와 푸른 사과향이 나는 여자가 있다. 아니 지울 수 없는 비린내가 나는 여자와 발가벗겨진 사과향이 나는 사내가 있다. 사내와 여자는 백제의 의자왕과 그의 애첩 은고이다. 의자왕은 백제가 처한 현실을 보려하지 않는다. 은고는 사내의 귀를 가리고 눈을 가리고 입을 막는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게 해주기에 은고는 진정 의자왕의 여자다. 아니 보고 싶지 않을 것을 보게 했어야 은고는 진정 의자왕의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운명은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아니 그들이 운명을 파멸로 이끈다.
이제 사내와 여자는 일제 강점기 남도 바닷가에서 마주한 장돌뱅이와 그에게서 도망친 창녀이다. 장돌뱅이는 더 갈데없는 땅의 끝까지 그녀를 찾으러 왔지만. 몸 속에 바람이 가득한 그이는 그 끝에 서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죽음 같은 바닷바람 사이로 사라지는 것이 여자인지 사내인지 알 수 없다. 사랑해야 할 사람 만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이 사랑이겠는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에 온당하다.
다시 사내와 여자는 서울 외곽의 연립주택 옥탑 방에 사는 용접공과 그의 아내이다. 부모도 친구도 없는 용접공에게 어느 날 친구라는 사람이 처음 찾아온다. 아내는 그가 반갑다. 그러나 남편은 친구가 반갑지 않다. 남편에게 과거는 없어져야 할 시간들이었다. 알려져서는 안 될 시간들이었다. 그는 두려워했고. 두려워했기에, 그 모든 일들은 일어나고야 만다. 그의 두려움이 운명의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운명이 그 두려움의 원인이었을까?

 

 

 

삶 속에, 삶과 삶 사이에, 삶과 삶 너머에 다른 삶이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알지 못할 뿐,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을 만나는 것이 처음이 아닌 것 같고. 당신과 헤어지는 것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 당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처음이 아닌 것 같고, 당신을 죽이는 것이 처음이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간을 사는 것은 처음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사실은 어렵고 생경하다. 그러나 느낌은 편안하고 익숙하다. 시간을 배반한다 하여도 무엇이 실체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낮의 나뭇잎의 색이 진짜인지 달마저 사라진 밤의 나뭇잎의 색이 진짜인지 우리는 밝혀낼 수 없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내 손에 닿은 너의 뜨거움, 그것 하나뿐이다. 그것이 혹여 핏물일지라도.

 

 

 

작가의 글
경계성 인격 장애로 살인사건을 일으킨 그 사람의 '사건'에 관해서 연민을 느꼈어요. '이 사람 의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싶었죠. 전생개념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딱하고 깨졌을 때… 삶에 관한 모든 것, 시간을 초월한 모든 것들이 나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사라지면서 구슬이 확하고 다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은. 완벽한 공간에서 떨어져 나올 때 그 곳에서 버려지고 쫓겨나거나 사라지는 것은 성경적이기도 하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전개되고 되풀이되는 것은 불교적이기도 하죠.
콜테스의 '숲에 이르기 직전의 밤'이라는 희곡이 있는데요, 그 내용과 상관없이 제목과 같은, 그런 숲에 이르기 직전의 고요 같은 결말을 그리고 싶었어요.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 그러나 논리로서 설명할 필요를 느끼는 것은 아니에요. 저는 일상이 아닌 "가상의 상징을 보여 주고 싶었어요. 관객들은 그 상징을 애증을 가지고 볼 수도 있고 연민을 가지고 볼 수도 있고 허망함을 가지고 볼 수도 있겠죠. 결국 무언가 결핍이거든요. 저는 종교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은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 고는 생각해요. 결핍된 존재라서 계속 뭔가를 잡으려고 한다고. 그런데 안 잡히죠. 잡을 수 없으니까 그것은 충족함 수 없는 욕망이죠.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거든요. 기독교적으로 보면 구원을 바란다고 볼 수도 있고.
그리고 이 작품에서는 시간과 언어에 대해서 그리고 역사에 대해서 다른 것들을 보여주려 애썼어요. 저는 무대의 언어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연극의 언어는 일상어와 약간은 달리해요- 일상적인 언어의 연극이 요즘엔 대세일 수도 있지만 저는 다르게 쓰고 싶었어요. 불필요한 말이라도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무대 위에서 존재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그리고 시간에 대해서는 백제 시대라는 대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중간이 저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라고 느껴지더라고요. 실제 시간과 상관없이 어떤 고대의 삶과 현재의 삶의 중간을 보여주는 시기는 그때가 아닌가. 무엇보다 연극은 그 모든 시간들을 무대 위에 다 구현할 수 있잖아요. 또한 동시에 구현할 수도 있고요. 연극은 시공간이 관통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르가 아닌가 싶어요. 결말은 계속 고민중이예요. 관객들이 윤회라고 느끼는 것을 제가 아니라고 반박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사람마다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결말로 마무리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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