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들이 등장해서 궐기대회를 벌인다. 무슨 궐기대회인고 하니,
해방을 맞아 의자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서 친일 반역자가 아닌
애국자들만 골라 앉히도록 투쟁하자는 결의를 다지는 궐기대회다.
여기에는 독립투사의 의자(고물상 의자)를 비롯하여 노조의자, 대학생 의자,
이발소 의자, 카페 소파, 호떡 의자, 냉면집 의자, 고문실 의자,
안락의자에 심지어 비단 방석까지 등장한다.
이들은 각각 자기들 이 모셔 앉히던 주인의 성격을 그대로 빌어
의인화된다. 예컨대, 안락의자나 비단 방석은 철 지난 양반 계층을
대변한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의자 특유의 입장에서 스스로
무생물임을 자처하며 어떻게 하면 이 시대를 올바로 살아 갈 것인가를 토의한다.
대회가 해산을 선언한 후 차례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감투 욕심에 눈먼 우파 지도자, 해외파 지식인 등인데,
모두 의자들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뒤 회의장에서 쫓겨난다.
이걸 본 의자들은 다시 단합하여 불량의자도 불러 다같이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자며 외친다.
<의자연석회의>는 기발한 작품이다. 이러한 설정은 대단히 '연극적'이며 요즘도 보기 드문 획기적인 발상이라고 하겠다. 이 작품에는 해방공간을 살아간 작가의 고뇌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면면은 곧 그 시대의 인간 군상들이다. 의자들의 입을 토해 나타나는 작가의 결론은 우선 친일파를 심판하고, 새로운 민주주의적 조국 건설을 위해 대동단결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계몽주의적인 관점은 당시로서 퍽 진지하고 필요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이 작품의 미덕은 다른 데에 있다. 즉, 그러한 교훈적 내용을 직설적으로 주장하기보다는 의자라는 무생물을 의인화시키고 회화화함으로써 연극적 재미를 창출함과 동시에 관객 스스로가 그 주장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된 고물상 의자가 해방을 맞은 의자들의 올바른 자세를 역설할 때 관객은 그 '거창한' 언사에 웃음이 터지겠지만 그 말의 타당성에는 누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자연석회의>를 무대화함에 있어서는 어떻게 이런 연극적 재미를 살리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특유의 연극성을 간파하고, 여러 가지 극적 장치로서 그 시대적 분위기와 해방을 맞은 우리 민족의 뜨거운 가슴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큰의미가 있다 하겠다.
「의자연석회의」는 '신천지' 1948년 10월호의 지면을 통해 발표된 단막 희곡이다. 이 희곡의 작가 조현은 후에 희곡 「쪼깐이」 ('신천지' 1949.7)를 더 발표하기도 했지만, 8.15 해방 이전이나 해방기 이후의 행적이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묘연한 작가다. 다만, 「의자연석회의」를 통해 나타난 작가 성향으로 보아서는 진보적 좌익 경향의 작가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작품 서두에서 작가 스스로 밝힌대로 「의자연석회의」는 송영의 우화소설 「의자」에서 모티브를 채용한 풍자 우화극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각양각색의 의자들이고 사람들은 부수적인 인물로서 간헐적으로만 무대에 등장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 극의 주요공간은 무생물인 의자들의 우화적 세계에 놓여있으며, 생물체인 사람들이 이같은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것은 풍자의 대상으로 희화될 필요가 있을 때 뿐이다. 의자들이 한데 모여서 '의자총궐기대회'를 여는데, 문지기 호떡걸상이 친일세력가(안락의자), 지주 (비단방석)등의 회의장 출입을 문제삼으면서 시비가 벌어지고 여기에 노동조합걸상과 이발관의자 등이 가세하여 특권계층이 비판을 받게 된다. 의장으로는 많은 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지하운동가 출신의 고물상걸상이 추대된다. 궐기대회의 의자들은 먼저 회의의 참가자격에 대해 논란을 벌이는데, 한 목소 리로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 냉혹한 자기 비판이 선행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민족반역자 의자들은 모두 퇴장할 것을 요구하며, 이에 따라 고문걸상이 몰매를 맞고 내쫓긴다. 의자라는 사물을 등장시켜 해방기의 사회현실을 풍자한 발상 자체가 기발하고 재미있는 데다 그같은 소재를 극적으로 끌고 나가는 수법 또한 만만치 않다. 무생물인 의자조차 일제잔재 청산과 새나라 건설 이라는 민족적 과제 앞에서 수동적 태도를 버리고 능동적으로 자기 주인을 스스로 찾으려고 하는데, 정작 사람들이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에 대해 꼬집고 비판하려는데 「의자연석회의」의 창작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다.
'한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가미상 신파극 '젖먹이 살인사건' (1) | 2025.03.13 |
---|---|
이재현 원작 정진수재구성 '선각자여' (2) | 2025.03.12 |
남정희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 | 2025.03.11 |
송천영 '인간주차' (2) | 2025.03.10 |
오현주 뮤지컬 '황제' (4) | 2025.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