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신은수 '봄이 사라진 계절'

clint 2023. 2. 24. 17:31

 

1909년 조선과 오늘의 우리 모습을 거울 보듯 마주하게 하는 <봄이 사라진 계절>은 역사적 실존인물과 사건에 픽션을 더한 작품으로 창작팩토리 사업에서 2011년 연극 대본공모에 선정되었고 2012년 연극부분 우수작품 제작 지원에 선정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완용이라는 한 개인의 집안에서의 일상과 드나드는 인물들 그들의 대화를 촘촘히 보여주며 종국에는 우리에게 큰 질문을 던진다. 100년 전이나 힘에 붙어 자신들의 이익세력을 놓지 않으려는 기득권에 의해 역사가 좌우되는 게 같다면, 역사 속에서 개인의 선택이 환경과 힘에 적응하고 순응하는 종의 습성과 같이 볼 수 있다면, 가장 영리한 개체가 그 선택을 잘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 역시 100년 전 애국지사 이재명이 아닌, 개인의 부와 영화를 선택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1900년 이완용은 그의 오른팔인 이인직을 통해 딸 소희의 영어를 가르칠 가정교사 이재명을 소개받는다. 이완용의 든든한 뒷배인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통감자리에서 물러나고, 급기야 안중근의 총에 죽음을 맞는 등 이완용의 정치적 입지는 급격하게 흔들리지만 이인직의 도움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이 와중에 소화는 창경원의 식물원과 동물원을 구경다니며 영어교사 이재명을 사모하게 되고, 이완용의 집에 식객처럼 드나드는 이인직은 미망인이 된 이완용의 며느리 임부인에게 연모의 감정을 갖는다. 같은 해 12 22일 이완용은 대한의사 이재명의 칼에 중상을 입었으나 점차 건강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소화의 배필이 되는 서병항을 맞으며 작품은 끝이 난다.

 

 

<봄이 사라진 계절>의 내용은 1900년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과 허구를 절묘하게 섞어 놓았다. 이완용을 공격한 대한의사 이재명을 소화의 가정교사로 설정하고 이완용을 대신해 죽은 인력거꾼 박원문을 이완용의 경호원으로 배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바로 이재명인데, 신은수 작가는 이재명을 100여 년의 미래에서 온 사람으로 설정하였다. 앞서 언급한 놀라운 연극적 장치는 바로 이것이며, 작품의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도 하다. <봄이 사라진 계절>의 내용을 얼핏 보면 이완용과 이인직 중심인 듯하지만 사실은 미래에서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파견된 이재명이 이 작품의 주인공인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주제는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들의 논리를 합리화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노골적으로 전면화하여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권력의 견고한 생리를 비꼬는 데에 있다. 도저히 바뀌지 않는 권력집단의 단단함은 미래에서 온 이재명조차 서서히 권력의 일상에 젖어 들게 만들었고, 결국 이완용 사위의 삶을 선택하는 그의 태도는 관객들에게 일종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친일파들의 뻔뻔한 논리를 직접 대면하는 분노를. 이러한 주제의 선명함과 미래인간이라는 연극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신은수 작가는 극사실주의적 양식을 적극 활용하고 있기에 작품의 전반적 분위기는 매우 잔잔하다. 친일파의 일상이 세세히 양각되어 있어 자칫 그들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이에 연출은 작품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희곡에 몇 가지 연극적 변화를 꾀하였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변화를 준 것은 작품의 구성이다. 1909 2월부터 1910 2월의 약 1년의 시간이 순차적으로 진행된 희곡의 구성을 이재명 중심으로 재구성하였다. 이완용과 첫 대면하는 장면부터 시작되는 공연은 이완용의 세계 즉, 권력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재명으로 끝을 맺는다. 소소한 일상이 뒤로 빠지면서 이재명과 이완용의 구도로 전환된 구성을 통해 친일논리의 합리화보다는 그 논리의 견고함이 더욱 부각되어 작품의 주제가 선명 해졌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보다 과장되고 세속화된 연기를 통해 입체화 된다. 대한제국황실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아들을 더 중요시하는 엄귀비는 속물스러운 어머니로, 소설과 연극 등 문화예술의 전방위에서 활동한 이인직의 문화론은 변절에 대한 가증스러운 변명으로, 이완용과 친일에 있어 어깨를 나란히 한 송병준은 우스꽝스러운 한량으로, 선한 아비의 모습 뒤에 자리잡은 이완용의 매국행위와 이기주의는 매우 극단적으로 그려진다.

작품의 주제를 보다 선명하게 제시하는 것은 무대이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 집안 답게 서양풍의 깔끔한 응접실이 주무대이고, 곳곳에 꽃들이 놓여있어 이완용의 집은 세련되고 한껏 고급스럽다. 그런데, 이 무대가 무언가에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바로 쓰레기더미, 우아함과 고상함으로 가득차 있는 듯한 그들의 새하얀 공간은 결국 쓰레기가 잔뜩 널려 있는 쓰레기장이라는 함의를 이미지로 만들어낸 무대는 곧 작가와 연출이 지향하는 이 작품의 주제를 시각적으로 완성시켜낸다.

<봄이 사라진 계절>, 권력의 견고한 논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 작품은 2013 2월의 대한민국에 매우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100여 년 전, 이 단단한 권력의 논리에 총을 겨눈 안중근의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권력의 달콤함에 항복한 작품 속의 이재명이 될 것인가? 조선이 망하던 1910년의 질문이 2013년 관객에게도 똑같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지금이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는 자각과 자책에서 비롯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늘 그렇듯 선택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신은수 작가의 변

희곡은 크게 인간의 보편적 실존성에 초점을 맞춘 작품과 현 사회에 초점을 맞춘, 사회성이 강한 시의적인 작품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작품의 초점이 인간이냐 사회냐, 로 나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실존성에 입각한 작품의 경우, 사회와 시대를 넘어 강한 지속성을 지닙니다. 셰익스피어나 체홉의 작품들이 나라와 시대를 넘어, 지속적으로 읽히고 공연되는 것은 이러한 작품의 성격과 관련이 클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실존적인 고민은 나라와 시대의 경계를 초월해 항상 변함이 없다는 것이죠. 반면 현 사회에 초점을 맞춘 작품의 경우, 같은 사회를 살고 있는 동시대인들에게 많은 공감을 얻어 좀 더 나은 파급력과 설득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나라)와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면 작품이 갖고 있던 파급력과 설득력은 점점 힘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결국 시대에 따라 사회는 변화하며, 동시대라 해도 이 세상은 각각의 다른 사회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엔 역사극이라 해도 위의 두가지 범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역사가 아니라, 역사를 배경으로, 역사를 통해 보여지는, 인간의 보편적 실존성, 또는 부조리한 현 사회의 모습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사 소재는 그것 자체가 몸통이 아닌, 마치 몸통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매력적인 옷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에 있어서의 역사 기록과는 다른 변형과 과장, 그리고 픽션의 삽입은 이 극이 말하고자 하는 목적에, 그것이 부합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무방한 것입니다. 단지 기록된 역사 그대로를 극으로서 형상화 한다는 차원이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봄이 사라진 계절의 경우, 두 가지 중 후자 쪽에 가까운 작품이 되었습니다. 역사를 소재로, 현 사회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었습니다. 매국노란 그저 일제강점기에나 있었던 과거의 인물들인가? 의식을 침투해 가는 문화의 힘이란? 대중이란 어떤 존재인가? 우리 민족은 과거를 학습하지 못하는 민족인가? 동물학자가 동물을 관찰하며, 종마다 다른 고유한 특성을 기록해 습성을 파악하는 것처럼 결국 한 나라의 역사란 민족마다 다른 영장류 인간의 습성이 기록된 기록서 일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더 이상 과거를 학습하지 못하는 민족이 되지 말았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의 작품은 시대의 경계를 넘어, 다음 시대에는 공연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은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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