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이반 투르게네프 원작 브라이언 프리엘 각색 '아버지와 아들'

clint 2022. 5. 15. 21:11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러시아 3대 문호로 추앙받는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1840년대 '관념과 이상의 세대''행동과 혁명의 세대' 간의 갈등을 그려내 발표 당시 보수와 진보 양편의 논쟁에 불을 붙이며 엄청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을 극작가 브라이언 프리엘이 희곡으로 재창조해냈다. 프리엘은 원작의 주제를 잘 살리면서도 연극이 가진 시적 언어와 유머, 그리고 깊이 있는 감정을 말과 말 사이에 담아내며 생생한 인물 묘사가 탁월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세대 간의 갈등과 더불어 사랑이라는 자기모순에 빠져버린 아름다운 인물들을 마주한다아일랜드의 체홉으로도 불리는 브라이언 프리엘은 시대를 거슬러 투르게네프에 문학적 뿌리를 둔 체홉의 연극성으로 <아버지와 아들>을 재창조했다. 계급사회가 몰락하던 러시아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구사회의 전복을 꿈꾸는 젊은 아들들과 걱정스런 눈길로 시대의 변화를 바라보는 아버지들의 갈등이 서정적으로 펼쳐진다. 시대정신을 반영한 강렬한 인물 묘사를 특징으로 했던 투르게네프의 소설은 브라이언 프리엘의 손길을 통해 떠나는 자와 남은 자의 일상과 덧없는 열정으로 대표되는 체홉식의 사랑과 유머를 담아내며 쓸쓸하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한 편의 연극으로 재탄생한다.

 

 

농노해방을 눈앞에 두고 러시아가 사회적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던 시기. 아르까디는 진보적인 사상과 열정을 가진 친구이자 스승 바자로프와 함께 아버지 니꼴라이와 백부가 살고 있는 니꼴라이 농장에 온다. 그리고 환영파티를 위해 안나 또한 초대를 받는다. 젊은 하녀와의 사이에서 얻은 갓난아이를 어떻게 이해시킬지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와 귀족 출신의 이상적 자유주의자인 백부, 젊고 열정적인 허무주의자 아들들 그리고 젊은 여인들이 모이면서 평범하고 조용한 러시아의 농가는 세대 간, 그리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는데...

 

 

아버지와 아들은 분명 1895년 농노 해방 무렵을 시대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오늘의 관객에게 가치있는 이유는 이 작품이 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시대상과 과거를 중첩시켜 시의성의여지를 주는 다양한 담론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사실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인물의 갈등과 화합을 그린 연극은 상당히 많다. 그러나 시대에 대한 논쟁, 거기에서 생겨난 담론에 대한 치열함 속에서 관객은 연극의 오늘날 우리 사회가 봉착한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동일하게 느끼게 해주는 작품은 많지 않다. 연극 아버지와 아들이 여타의 러시아 작품보다 오늘을 사는 관객에게 더 큰 시의성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사실적인 구현과 상징의 혼합적 표현을 활용한다. 이러한 맥락은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통해서도 두드러지는데 메시지의 중심에는 세대교체문제가 대두된다. 유산계급으로 치환되는 아르까디의 집안과 무산계급으로 대변되는 바자로프의 집안을 번갈아 조명하는 형식으로 세대 갈등에 대한 견해 자체에 대한 언급 뿐 만아니라 세대 내부에서 일어나는 계급 간 견해 차이까지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아르까디의 집안은 자본가의 집으로써 구세대로 대변되는 큰아버지를 중심으로 사회 개혁에 대한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며 이념에 대한 강제력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적 움직임이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는 바자로프는 신세대의 전형으로 그려지는데 그렇기에 큰 아버지와 대립한다. 반면에 무산계급으로 그려지는 바자로프의 집안은 아들을 숭배한다는 표현을 쓰는 바자로프의 부모들을 통해 구세대가 신세대와 화합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점을 드러낸다. 구세대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무산계급 또한 갈등을 겪는데 사회 모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는 구세대의 긍정성을 바보스럽다고 여기는 바자로프의 견해 때문이다. 신세대의 사회를 대하는 방식과 무산계급 구세대의 이념 또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 세대가 계급 간에 다른 양상을 보인 것처럼 아들 세대에서도 다른 양상을 읽어낼 수 있다. 아르까디와 바자로프는 공통적으로 모든 것을 부정하고, ‘의미 없음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다는 니힐리즘을 신봉한다. 하지만 자본가의 아들 아르까디는 바자로프와 달리 구세대가 쌓아놓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인정은 한다. 구세대의 전형으로 대변되는 큰 아버지가 알 수 없는 불어를 읊조리며 책상에 앉아 늘 지나간 이론들과 씨름하는 것에 대해 모두가 그를 비웃지만 아르까디는 그의 과거 업적에 대해는 부정도, 비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자로프는 그런 모든 것들을 부정한다. 상류 집안은 신사적임, 점잖음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그의 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는 이 두 청년이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아르까디는 결국 자신과 비슷한 유산계급의 발랄한 여자 까쟈와 결혼하고, 무산계급이었다가 남편에 의해 자본가가 된 안나에게 사랑을 느끼는 바자로프는 그녀와 자신 사이에서 사상적 공통분모를 찾고나서 그녀에게 깊은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현실에 놓인 벽을 스스로 더 높이 쌓고 이루어지지 못하는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결론만 보면 극단적 진보주의 청년 바자로프의 죽음 이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통해 비극적이고 모순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이 작품의 현 주소이다. 이 작품이 우리 시대의 담론을 그려내고 있다는 가정을 하고 보면 바자로프의 죽음은 개혁가의 죽음으로 결론지을 수 있으므로 희망이 죽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바자로프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열린 아르까디 부자의 결혼식에서 피로연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그의 뜻을 받들겠다는 유산계급 아르까디의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결혼식 도중에 바자로프를 대신해 니힐리즘을 계승하겠다고 부르짖는 아르까디의 말이 신빙성 있는가 이다. 수 많은 아르까디가 오늘날까지 존재했겠지만 과연 문제 해결을 할 수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날에 결혼하는 비논리적인 세상에 대한 단면, 그리고 개혁의 목소리를 시끌벅적한 축제로 무마하려는 부패적 삶의 모습, 진실을 마주했을 때 도망가려는 현상에 대한 단면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드러난 부분이 결혼식 장면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어떠한지를 가장 강렬하게 쏟아내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관객은 스스로 가장 큰 동요와 심정적 자극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