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쾅! 쾅! 쾅! 12월 마지막날 밤 12시 직전. 새해를 기다리며 파티를 하려는 한 부부에게 의문의 사내가 찾아온다. 매일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공포의 시대. 자신을 비밀경찰이라고 소개한 낯선 손님 ‘비지터’는 서로를 애지중지하는 부부에게 충격적인 비밀을 폭로한다. 서로에게 감추고 있던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이 부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심리 스릴러인 이 작품은 인간 내면에 감춰진 어두운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부부를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지터는 부부의 나약함과 비열함을 끊임없이 두드리며 숨어 있는 잔혹한 본성을 드러나게 한다. 극한에 몰린 인간이 보여 주는 날것 그대로의 본능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극의 배경은 구소련 스탈린 체제. 비밀경찰 ‘엔카베데’ 주도로 국가에 반기를 드는 반혁명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이 자행된 시절이다. 고위 간부인 남편은 아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헌신하는 다정한 남자다. 아내는 매일 밤 엔카베데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에 공포를 느끼며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여린 여자다. 그런 그들에게 비지터는 충격적인 소식을 늘어놓는다. 착한 줄만 알았던 남편은 변호사 친구를 반역자라며 당국에 고발한다. 실망을 금치 못하는 아내를 보며 남편은 그저 “당신과 나,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선택만 있었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이내 아내도 남편과 다를 게 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비지터가 죽기 전 자신을 ‘악마’라고 부르는 남편에게 한 말은 곧장 관객에게 돌아와 화살처럼 꽂힌다. “뿔 달리고 불을 내뿜어야 악마라고? 길을 걷다 만날 수 있는 보통 사람일 걸. 당신과 전혀 다를 게 없는. 그리고 왜 내가 여기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수백, 수천 곳에 내가 있을지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비지터가 되살아나 무대에 다시 등장하면서 그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증폭된다. 배우들의 촘촘하고 격정적인 대화 사이로 흐르는 피아노 선율은 극의 긴장감을 더한다.

아제르바이잔의 부총리이자 작가인 엘친 아판디예프(Elchin Afandiyev)의 연극 ‘지옥의 시민들(Citizens of Hell)‘ 니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국 뮤지컬 ‘미드나잇(Midnight)‘도 같은 내용이다.
스탈린 시대 소비에트 연방에서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공식적으로 68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반혁명분자’나 ‘인민의 적’으로 고발되어 숙청당했던 ‘대숙청(Great Purge)’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뮤지컬 ‘미드나잇‘은 숙청이 가장 집중되었던 1937년에서 1938년으로 넘어가는 12월 31일, ‘자정’을 소재로 하고 있다.
명확한 이유도 없이 사람들이 잡혀가고 거짓된 고발로 인해 고문과 총살, 유형, 죽음이 끝도 없이 이어지던 아제르바이잔의 한 아파트에는 남자(맨)와 여자(우먼)가 살얼음판 같은 현실 속을 어떻게든 버텨나가기 위해 불안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옆집 문이 두드려지고 오늘도 또 다른 부부에게 알 수 없는 고발과 이별, 폭력과 공포가 닥친 순간 여자는 떨리는 손으로 두 귀를 틀어막으며 아직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초초하게 기다린다. 제발 그에게는 아무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집안을 서성이는 여자는 밖에서 들려오는 비밀경찰 ‘엔카베데(NKVD)’의 고함소리와 가구가 넘어지는 소리, 저항하는 남자가 아내를 안심시키는 소리와 흐느끼는 울음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새해를 맞이하기 위한 테이블을 준비한다. 무대는 “현실적인 아파트”라는 공간을 구현하지만 12월 31일 ‘자정’이 되기 몇 분 전에 찾아오는 방문객(비지터)은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한 꺼풀씩 벗겨지는 맨와 우먼의 비밀과 과거의 기억들이 드러날 때마다 시공간을 초월해 움직이며 경계를 무너뜨린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우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꿈꿨던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었던 신념과 이상에 배신당하고 ‘생존’ 외에는 추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폭로한다.
‘비지터’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다. 그는 부족한 ‘한 명’이라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부부를 이간질하고 갈라놓으려는 현실 속 엔카베데일 수도 있고, 남자와 여자의 영혼을 데려가기 위해 나타난 비현실 속 악마일 수도 있으며,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잠들어있던 고통스러운 양심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는 오직 ‘진실’과 ‘타당한 응징’을 부르짖는다.
드디어 멈춰졌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관객들의 마음이 무겁고 아픈 것은 ‘비지터’의 마지막 말이 비수처럼 꽂히기 때문일 것이다.
암흑 속에서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죽음이라는 끝일까? 사후일까? 나의 ‘생존’을 위해 다른 누군가를 ‘죽음’으로 몰아넣던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죽음이었을까? 죄악이었을까?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나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것일까? 선과 악, 빛과 어둠 그 경계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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