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일본이 마침내 근대 자본주의 국가가 되기 시작했을 때, 케이는 고아의 상황에 있던 자신을 받아준 쓰쓰미 가문의 하녀가 된다. 국내외 무역으로 가문을 이룬 쓰쓰미 가는 이미 주인이 죽었고 아들들은 아직 어렸고, 주인 아내 시즈는 친척 쇼스케와 함께 어려운 시대에 가문을 이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는 그녀의 성실함과 열린 성격에 시즈는 장남 신타로의 아내로, 그녀의 며느리로 낙점한다. 가문의 사업을 이을 적임자로 본 것이다. 케이는 둘째 아들 에이지와의 어릴적 연정은 끊어지고, 쓰쓰미 가문의 중추가 된다. 그리고 케이의 "여자의 일생"은 시즈를 대신한 가문의 기둥으로 막중한 무게를 견뎌내면서 살아나간다. 이 이야기는 러일 전쟁이 열렸던 1905년에 시작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10월에 끝난다. 이 이야기는 일본 근대사를 관통하면서 벌어지는 대하드라마다.
러일 전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노동쟁의, 청일전쟁, 태평양 전쟁 등이 그러한 배경이다.
전쟁의 참화로 황폐해진 도쿄 쓰쓰미 가문의 폐허에서 케이는 에이지를 다시 만나고, 조그마한 희망의 춤을 추며 끝난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케이의 성장 스토리이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굴곡 속에서 고아나 다름없는 케이가 우연히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하는 쓰쓰미 가문과 인연을 맺고 사업가로서 성장하는 일생을 그려낸다.
『여자의 일생』은 폐결핵으로 요절한 모리모토 가오루(森本蕙, 1912-1946, 이후 ‘모리모토’로 통일)의 마지막 작품으로 1945년 4월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극단 분가쿠자(文学座)에 의해 초연(구보타 만타로 연출)되었다. 이후 모리모토의 사망 이후 추도 공연으로 선정되어 1946년 11월 재공연 이후, 특히 1947년 8월 공연의 호평에 힘입어 주인공 케이 역을 맡았던 스기무라 하루코(杉村春子, 1906-1997, 이후 ‘스기무라’로 통일) 생전의 출연만으로도 947회를 기록하는 등, 분가쿠자와 스기무라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이 끝난 1946년, 모리모토는 이 작품의 제1막 1장과 제5막 2장을 대대적으로 수정한다. 초고에서는 1942년, 노년이 된 케이의 회상으로 시작해 1905년부터 1928년까지 케이의 과거를 그려내고, 마지막에 1942년으로 돌아와 회상이 마무리되는 구성이나 개정판에서의 수정으로 회상 장면은 삭제되었다. 초고에서도 전쟁이 한창인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만, 개정된 원고에서는 제1막 1장과 제5막 2장에 패전 이후의 일본 현실을 추가로 반영하여 1945년 10월, 불타버린 집터에서 케이와 에이지가 재회하는 장면으로 변경되었다. 이 원고는 분메이샤라는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모리모토의 사망 이후 분메이샤의 개정판은 『모리모토 가오루 희곡집』전3권(京都世界 文学社, 1948년), 『여자의 일생』 (三笠文庫, 1952년) 등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1961년, 초연에서 연출조수로 관여하고 이후에는 『여자의 일생』 연출을 담당해온 이누이 이치로(戌井市郎)에 의해, 이 작품의 분가쿠자 재공연은 작가의 개정판 그대로 한 번도 공연된 적이 없음이 밝혀졌다. 또한 그는 작가의 개정판에 대해 모리모토가 직접 수정에 개입한 부분 이외에,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시 점령군이었던 미군의 검열을 의식해 출판사 측에서 추가로 대사를 삭제하거나 미국 측에서 관여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1968년에는 이누이 이치로가 작가의 개정판을 토대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삭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초고의 대사를 추가하고, 공연 대본으로서 자신의 수정을 가미한 「여자의 일생」이 『모리모토 가오루 희곡 전집』에 수록되어 보구요샤(牧羊社)라는 출판사를 통해 출간되었다. 『여자의 일생』은 분가쿠자의 대표작으로 거듭 공연되었고, 이후 다른 출판사에서도 이누이 이치로의 수정 대본을 토대로 한 책이 출간되면서 이후 이 보구요샤 버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5년에 모리모토가 쓴 초고는 출판되지 않아 작가의 자필 대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복사본을 스기무라 하루코가 소장하고 있었다. 1996년 3월에 잡지 『시어터 아트』에서 『여자의 일생』특집호가 간행되었는데, 그 지면에 모리모토의 초고가 공개되었다. 이전부터 희곡의 전체적인 내용, 주인공 케이의 인물상으로 볼 때 이 초고가 정본(定本)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고, 최근에는 초고를 토대로 한 공연이 올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연된 『여자의 일생』공연이 분메이샤의 개정판을 토대로 하고 있는 점, 특히 작가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제1막 1장과 제5막 2장을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변경한 것은, 패전 후의 일본을 반영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때문에 이번 번역본에서는 분메이샤의 개정판을 토대로 번역을 진행했다. 하지만 분메이샤의 개정판에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불가피한 수정이 있었다는 점도 고려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변경 전의 초고의 대사와 장면도 함께 번역· 추가하였다.
모리모토의 초고에는 이런 국책극의 성향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제1막에서 노년의 케이는 ‘전쟁은 우리가 죽은 후에 살아있는 정화의 불빛’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에이지가 중국의 부인과 얻은 딸들은 일본의 문화를 찬양하며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고' 있다고 감격한다. 사업가로서 케이의 사고방식은 정부의 침략전쟁에 동조하는 것이었고, 에이지는 전향하여 일본군과 정부를 위한 선무공작 활동 중이다. 5막에서 케이는 출정하는 병사들이 ‘새로운 시대를 창조하기 위해' 전장으로 나간다고 읊조린다. 그런데 초고에서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쟁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동시에 존재한다. 특히 청일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쇼스케를 통해 전쟁을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비록 쇼스케는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되고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등장인물은 없지만, 중일전쟁에서 여순이 함락되어 들뜬 분위기가 과도하다며 ‘결과보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쓰쓰미 일가가 전쟁 덕분에 재산을 일구었는데, 케이처럼 ‘같은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고 생일날에 거리를 방황하는 이도 있고... 세상이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라며 한탄한다. 쇼스케는 전쟁 중인 일본의 상황에서 한 발짝 물러나 당시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스기무라에 의하면, 전쟁 이후 『여자의 일생』 재공연이 거론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달했을 때, 모리모토가 재공연을 달갑지 않아했다고 한다. 그가 이 작품을 왜 좋아하지 않았는지 모리모토 자신이 그 이유를 직접 언급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어쨌든 모리모토에게는 이 작품을 초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이유가 존재했던 것이다.
작가는 개정판에서 앞서 언급했던 국책극적인 요소들을 거의 다 들어냈다. 제1막 1장과 제5막 2장에서 회상이라는 설정을 들어낸 개정판에서는 케이와 에이지의 재회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 작품의 분위기를 크게 변화시킨다. 제2막에서 케이는 에이지에 대한 마음을 억지로 접고 신타로와의 결혼을 결심해야 했다. 결혼 후에는 항일운동을 하던 에이지를 경찰에 넘겼고, 남편 신타로와도 불화를 겪는다. 첫사랑이지만 이어질 수 없었던 에이지와의 재회, 그리고 춤을 추자는 에이지의 권유를 케이가 수락하는 마지막 장면은 케이에게 에이지와의 과거 갈등에 대한 화해의 기회를 제공해줌과 동시에 로맨틱한 분위기마저 조성시킨다. 불타버린 집터는 전쟁을 겪은 관객들에게 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것이고, 에이지와의 아련한 첫사랑으로 끝나버린 초고와는 달리 첫사랑이었던 남녀가 노년이 되어 재회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강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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