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치 비트키에비치 '쇠물닭'

clint 2022. 4. 19. 12:46

 

 

작가는 자신의 연극론을 순수한 형식을 위한 극장이라고 불렀는데, 마치 추상화나 실체없는 소리들처럼, 그는 순수한 형식이자 통일되고도 무의미한 무언가를 꿈꾸었다. 그러나 무대란 본질적으로 배역과 인간들이 지배하므로 화가였던 그는 연극이 그림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그는 때때로 '인간'을 제거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그의 무대를 '부조리'하게 만든다. <쇠물닭>은 그러한 시도가 가장 절실하게 나타나는데, 이 희곡은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희곡에 가깝다. 쇠물닭이라 불리는 여자가 한 남자로 하여금 스스로를 쏘라고 명하며 결국 죽어 사라지고, 아들로 보이는 이는 아버지를 부르면서도, 둘이 정말로 부자 관계인지도 알 수 없다. 혹은 도대체 '쇠물닭'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입센의 <들오리>나 체호프의 <갈매기>처럼 무언가 의미가 있는지, 혹은 무의미한 장난인지, 대관절 관객으로선 무수한 의문을 품지만, 어느 것 하나 답해지는 것은 없다. 그는 이 극을 '구체극'이라 이름 붙였다. 마치 시작과 끝이 없는 원처럼, 무한이 무대를 감싸며 답이 보이지 않는 존재를 탐구하게 만들기에. 그리고 때때로 그것은 거기에서 사람을 없애고, 시체들로 채우는지도 모른다.

 

 

 

<쇠물닭(Kurka wodna)>에서 중심 인물은 다음 막에서의 부활을 위해 총상으로 죽게 된다. 1914년 말리노프스키와 함께 떠난 남태평양 멜라네시아와 오세아니아 현지에서 비트카시는 남녀 사이의 난교와 가혹한 신체 학대를 목격한 바 있다. 그가 본 성도착과 고문, 종교적 제의의 광경은 미지의 낯선 존재와의 대면을 위한 방식이자 자기 존재의 상실과 고독에 대한 형이상학적대응이었다. 그의 연극 <쇠물닭>은 이러한 측면을 잘 드러낸다. 죽었던 인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몇 차례고 살아나며 무대 위에 등장하길 반복한다. 2막에서 죽은 네버모어(Nevermore) 공작부인의 시신 안치 직후 더욱 젊어진 모습의 임산부로 살아등장한다. 안치된 노부인의 형상은 이내 위장된 인형이었음을 알게 된다. 공작부인의 남편은 말리노프스키의 다른 대리적 자아로 존재한다. 그는 과거의 영웅이다. 아프리카에서 받은 호랑이의 습격으로 내장이 산산이 찢겨졌으나, 그러한 상태에서도 그는 화이트헤드의 수학원리를 탐독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형이상학적 속임수임을 그 자신은 완전히 인지하고 있다. 제목으로 붙은 쇠물닭”(Kurka Wodna)은 본래 그의 부인 네버모어에게 칭해진 별명이었다. 허나 이 역시 속임수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Kurka)은 그 어감상 매춘부를 뜻하는 폴란드어 쿠르와”(Kurwa)와 미묘한 청각적 혼동을 일으킨다. 부인의 존재를 두고 야기되는 이중적 암시가 이미 지시적 기능을 상실시키고 있는 것이다. 작품 속 영웅에드가(Edgar)는 자칭 예술가로서 자신의 개별성을 찾기 위해 존재한다. 에드가가 만드는 실재는 비트카시가 연극에서의 순수 형태를 통해 제시한 몽상 그 자체이다. 모든 극중 인물은 그의 이러한 몽상 속에 배치된다. 한편이는 영웅의 존재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직 기계적 하인의 유형으로 퇴화하지 않은 모든 인물은 각자 자신만의 단일성을 찾기 위해 지속적으로 행동한다. 비트카시 스스로 <쇠물닭>은 진실된 창조성에 관한 연극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