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도쿄의 타카다노바바 · 신쥬쿠 일대를 무대로 하는 야외시가극으로서 연극 실험실 <천정 부두>가 초연.
관객은 거리를 방황하며 동시다발적으로 행해지는 퍼포먼스를 감상하고 자신도 그 연극 속에 편입되어 가는 기존 극의 시스템을 해체하려는 시도이다. 이듬해 프랑스 네덜란드에서도 공연돼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 극에는 끝이 없다. 이 연극은 흘러서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일상성에 무인도를 들고 가서 어디서부터라도 계속하는 것을 요망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의문부의 제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작가의 글
노인 헨리 밀러는 「권총에 손이 가는 순간」이라는 에세이에서 오늘의 유럽은 끝이 났다고 말했다. 이런 소릴 들으면 나는 정말 권총을 움켜잡고 한방 쏘고 싶어진다.
“형태학적(形態學的)이며, 현상학적(現象學的)인 그 눈부신 한 권의 시적 저서인 「유럽의 몰락」을 나만큼 가슴 설레며 읽은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문화가 금으로 도금한 새장 속의 한 마리 새에 지나지 않았던 아득히 먼 옛날, 내가 베르테르에 견줄 만한 여러 가지 고뇌를 몽땅 겪었다고 짐작하여 슬픔에 잠겨 있었던 무렵, 종말을 노래한 음악만큼 내 귓전에 달콤하게 울린 것은 달리 없었다. 허나 지금 나는 그 종말을 겪고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유럽의 종말, 미국의 종말 죽은 자가 우리와 함께 있으며, 언제든 무덤에서 호출되는 채비를 하고 있음을 나는 깨달은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있어서 유럽은 무엇인가. 미국은 코카콜라며, 진흙 발로 짓이기는 폭력의 카우보이이며, 견줄 수 없는 벼락부자인 정복자이며, 육체이며, 국가 형태의 영원한 실험이며, 암을 내포하는 대협곡이며, 보브 호프의 아가리에 물린 시가 담배 연기를 베트남 하늘 가득히 뿌리는 넉살 좋은 범죄자였다. 하지만 유럽은 어떠한가? 성숙한 노인들의 문명,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종말의 무덤으로부터 호출되기를 기다리는 서구 도시의 구획화된 콘크리트 위에 세울 무인도를 우리는 구상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유럽은 「아직도 미지」며 온갖 종류 만남의 시작임을 의미한다. 만약에 사람들이 자기가 만들어낸 것 속에서만 살 수 있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닥쳐올 유럽은 지금으로부터 생성하는 장소이며, 종말이나 죽은 매 날개의 마지막 퍼덕거림, 노인 헨리· 밀러의 추상(追想)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유럽은 우리 여행 가방의 위탁소, 그 이전의 우리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상상력 동일화와 분극(分極). 필요한 관리와 지배의 여행 안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유럽 문패에 작별을 고하려는 시도(試圖)」는 앞으로 할 일이니 두고 볼 따름이다. 시벵글러는 너무 일찍 태어난 탓으로 우리들과 시간 적으로 맞지 않는다. 우리들은 지금으로부터 모든 것을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후, 그것을 검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력 비행기 솔로몬= 유럽」, 이는 그들의 종말을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고 유럽 문명 도시의 전통의 무덤으로부터 살아있는 인간을 불러들이는 시도이다. 이것을 연극의 혁명화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혁명의 연극화이며, 역사마저도 1막의 서사극으로 전환시켜 버리는 상상력 세계로부터의 외침이다. 굿텐타크! 샤오! 봉수와르! 콘 니치와! 오하요오!
- 1971년 5월 2일. 프랑스 낭시 시(市) 정오에서부터 오후 9시까지의 환상 「실제적으로 기술(記述)되지 않은 것도 역사의 이면(裏面)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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