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카릴 처칠 역, 이지훈 각색 '말레우스 말레피까룸 마녀 사냥'

clint 2022. 4. 6. 19:25

 

마녀 학살과 정신대 - 이지훈

동화 속의 마녀는 늘 나쁜 여자다. 백설 공주의 새왕비는 마녀로 할멈으로 변장하여 공주에게 독이 든 빨간 사과를 먹인다. 인어 공주의 마녀는 공주의 예쁜 목소리를 빼앗는다. 마녀는 왕자에게 마술을 걸어 백조로 변하게 하기도 하고, 헨델과 그레텔을 유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마녀들은 마술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워하고 싫어했을 것이다. 보통 여자들이 가지지 못한 것은 가지고 있거나, 보통 여자들이 감히 하려고 하지 않는, 하지 못하는 어떤 일을 하거나 하려고 시도하는 여자들 아마 그래서 그들은 마녀라 불렸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복수를 당하고 마녀사냥을 당해 죽어갔다. 거꾸로 뒤집으면, 능력 있는 여자들이 마녀였던 셈이다. 이 마녀의 모습 저 밑에는 남성 중심' 세계에서 남성에 의해 철저히 원천 봉쇄당했던 자신들의 기회와 능력을 통렬히 깨달은 여성 자신들의 무력감이 반영되어 있다. 거꾸로 뒤집어진 이 도전은 물론 학살로 끝나 버렸지만 말이다. 서구의 여자들이 마녀 학살극에 희생되어 처참히 죽어갔다면 우리 한국의 여자들은 일제 강점기 그들의 야만성에 의해 아프게 짓밟혀야 했다. 소위 정신대, 종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역사 속에서 은폐되고 왜곡된 진실이 조금씩이나마 드러나고 있다. 특히 우리 경남 지역은 이남이() 할머니를 통해 더 실감나게 그 역사를 대면하고 있다.

정신대 여성들의 아픈 상처가 "낮은 목소리" 1· 2라는 두 개의 다큐멘타리 영화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그 진실이 널리 알려진 것처럼, 마녀 사냥의 진실도 이제서야 카릴 처칠 이라는 탁월한 여성작가에 의해 여성 학살극이었던 것이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유태인들이 학살의 아우슈비츠를 기억하듯이 민족의 아픔으로 또 여성의 아픔으로 정신대를 기억해야 한다. 부디 우리 작품이 역사 속에서 박해받은 여성들, 특히 마녀로 죽어 간 불쌍한 여성들과 정신대에서 모진 고생을 하고 죽어간 우리 한국 여성들의 아픔을 기억하는 의미가 되기를 바란다. 이름을 밝히며 진상을 밝힌 여성들의 용기 덕분에 우리는 그 어두운 역사의 그림자들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많은 여성도 있음을 기억한다. 그분들이 이름은 밝히고 나서지 못하는 그 슬픈 현실이 더욱 가슴 아플 뿐이다. 역사 속에서 제 이름을 잃어버린 그분들을 기억하고 그분들은 위해 이 공연을 바치고 싶다.

 

 

비네가 탐- 마녀사냥. 비네가 탐의 마녀사냥이라는 소재는 사실 우리에게 흥밋거리

이상의 관심을 주지 않는, 생소하다면 생소한 소재이다. 그러나 미녀 사냥과 같은 여성 차별과 억압, 학살을 이처럼 뚜렷하게 보여주는 더 이상의 역사적 사건은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유럽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 모두에게 마녀사냥의 신상과 실체를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좋은 기회로 삼고자 했다. 작가의 고민 역시 그러했다. 이미 2~300년 전에 끝나 버린 역사적 사건은 오늘의 영국인과 유럽인에게 어떻게 되살려 전해줄 것인가에 대해 그녀도 고심했다. 극단 TNT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처칠의 해결 방법은 전체 21장으로 구성된 극의 사이 사이에 들어가는 7개의 노래였다. 21개의 장면은 17세기의 과거의 장면을 재현해서 그려 내고 있지만, 그 노래들은 철저히 20세기 현재의 관점에서 불리워지는 것이다. 이 노래는 캐릭터가 아닌 별도의 배우들이 현대적 복장을 입고 부르도록 했다. 그것은 아마도 1970년대, 런던의 보통의 젊은 여성들이 입었던 가장 전형적인 차림- 찢어지고 물 바랜 청바지와 티셔츠나 블라우스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연극적 경험은 드디어 동시적 관점과 대조되면서 그들의 것이 되었던 것이다.

TNT 역시 노래를 사용했다. 그러나 별도의 배우들이 아니라 캐러터들이 직접 부르도록 했다. 또 그 노래는 처칠의 현대 영국의 감각을 담은 노래가 아니고 우리 한국의 상황에 알맞은 내용으로 새롭게 씌어진 노래였다. 그것은 TNT가 연극 속에 또 하나의 연극은 집에 넣는 '극중극'의 장치를 했기에 가능했다. 마녀사냥은 오늘에 일어난 한국적인 사건으로 접목해 보려는 의도는 이 극중극 장치로 웬만큼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또 한 가지 바꾼 것은 작품의 제목이다. 비네가 탐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도 던져 주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극의 말미에 나오는 노 신학자가 쓴 책 말레우스 말레피까룸(마녀의 망치)을 제목으로 달기로 했다. 물론 이 제목도 너도 어렵기 때문에 뒤에다 마녀사냥이라는 우리만 부제를 함께 닫았다. 그런데 역시 이 라틴어 제목은 너무 어려워서 극은 그냥 마녀 사냥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극의 구성은 원본의 1장과 2장의 순서만 바꾸었을 뿐이다. 그것은 연극 속에 휘말려 들어가게 된 두 여기자가 너무 빨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 마저리와 잭이 먼저 연극을 열고 첫 장면을 하는 동안 그들은 이 상황에 적용하는 시간적 여유를 벌 수 있도록 했다. 다른 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말레우스 말레피까룸>(Malleus Maleficarum)1489년 스프랭거와 크래머라는 두 신학자가 쓴 책의 제목이다. "마녀의 망치" 혹은 "마녀 잡는 망치"라는 뜻의 이 책은 마녀 잡는 길잡이로서 마녀에 대한 모든 것, 마녀가 되는 조건, 마녀의 정체, 성격, 사냥의 기술, 고문, 사형 등이 총망라되어 있다. 이 책은 그 후 400년 동안 모든 마녀 사냥꾼과 재판관들의 교과서가 되어 여자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