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에 첫 공연을 한 〈하얀 꽃을 감추다〉는 사건의 화제성만큼이나 관심을 받으며 무대적으로 성공하였다. 연출을 맡은 오가사와라 교는 이 작품으로 제25회 요미우리 연극대상 우수연출가상을 수상하였다. 첫 무대의 성공은 이듬해 여름 재공연으로 이어졌다.
희곡은 두 개의 큰 기둥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2001년에 일어난 NHK 프로그램 ‘변경사건'(2001년 1월 30일에 방영한 NHK ETV 특집 시리즈 <전쟁을 어떻게 재판하는가>의 제2화 "전시 성폭력에 대해 듣는다”에 관한 일련의 소동이다)이고, 또 하나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단막극 <페튜니아를 짓밟은 거인>, 즉 페튜니아 파괴사건이다. 프로그램 변경사건이 팩트라면, 페튜니아 파괴사건은 픽션이라는 차이가 있다.
먼저 NHK 프로그램 변경사건은 구일본군에 의한 종군위안부제도를 재판하는 여성국제 전범법정(일본의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 법정을 모의한 민간단체의 활동이다.)을 취재하여 방영하기로 한 계획이 기획 단계 의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방영된 사실을 둘러싼 진실 공방의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의 무대를 굳이 NHK 방송국 내부로 하지 않고, 프로그램 제작을 맡은 하청 회사에 두었다. 처음부터 사실을 은폐하고 진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방송국 쪽보다는, 끝까지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이 속해 있는 제작회사를 무대로 하고 작품을 전개하는 것이 극작법상 자연스러웠다고 밝히고 있다.
초연에서는 그 초점을 ‘프로그램 변경사건'에 두었다면, 재공연에서는 여성국제전범법정에 두고 있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때마침 전 세계적으로 불었던 미투(Me Too)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성국제전범종전에서의 구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은 미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는 초연 포스터의 표제를 “감춰진 사실은 무수한 진실을 낳는다”, 재공연의 표계를 "하나의 사실, 각각의 진실, 비뚤어진 현실”로 표현한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작가는 이 사건을 제재로 삼은 의도에 대해, 어쩌면 '과거의 비극'으로 끝났을지도 모르는 위안부 문제를 부인한 것은 이것이 국가 주도의 성노예제도였기 때문임을 오히려 반증하는 것으로, 관객들에게도 보일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작가 자신이 표현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날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작가는 위안부 관련 작품으로 2015년 여름 배우 우라테 후사코 와 함께 일본인 위안부의 삶을 그린 일인극 (2017년에는 2인극으로 각색)〈꿈을 꾸다(夢友見石)〉를 공연한 바가 있다.
이 작품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사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주인공 후지타라는 남성 디렉터의 설정이다. 이 점은 작품 전체의 주제와 전개 방법에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사건의 실제 모델은 여성이다. 초연 당시의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그 이유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고, 아직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작가는 가장 큰 이유는 처음부터 남자주인공이 정해진 상태에서 이 공연의 기획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유는 실제 사건을 픽션으로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해 실제 인물과 거리를 두기 위해 하나의 창작을 한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을 남자로 설정한 부분에 대해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실제 인물인 사카가미 가오루 씨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여성국제전범법정'에 밀착취재를 할 수 있었던 것이고, 그때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이후 미투운동 등의 영향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변화가 생겨, 지금은 오히려 이 배역이 여성이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앞에서 언급한 테네시 윌리엄스의 <페튜니아를 짓밟은 거인>의 차용방법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무대가 열리면서 마이코가 페튜니아를 손질하는 장면이 나온다. 페튜니아 파괴사건의 여자 주인공 도로시 심플 양이 변화되기 이전의 모습이 떠오른다. 페튜니아가 “무료하지만 정갈한 소시민적 삶”을 상징하듯이 마이코는 지금의 안정된 삶에 안주하려는 인물이다. 반면에 그녀와 갈등관계에 있는 언니 요코는 자유롭고 적극적인 삶을 지향하는 인물이다. 요코는 거인을 따라 일상의 삶을 버리고 떠나는 거인을 만난 이후 변화된 도로시 심플 양을 연상케 한다.
이와 같은 논리로 본다면 남자주인공 후지타 감독은 남자일 수밖에 없다. 정의(혹은 진실)를 구현하기 위해 부조리와 모순에 타협하지 않고, 요코와 함께 떠나는 후지타의 모습은 다름 아닌 페튜니아 파괴사건의 거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자회견을 보던 오토모가 페튜니아를 짓밟고, 끝내는 정의로 상징되는 하얀 꽃을 찾으러 집을 나간다. 거인이 페튜니아를 짓밟아 도로시를 깨우려던 행동은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고 있던 오토모에게 자신을 깨트리고, 분연히 정의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하얀 꽃을 숨기다〉라고 하는 제목은 은폐되고 부인되고 있는 정의를 나타내지만, 극의 마지막 장면은 반전을 기대하게 하는 작가의 희망적인 메시지로 해석된다.
'외국희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해주 재창작 '카산드라의 예언' (1) | 2022.04.28 |
---|---|
다니 겐이치 '1986년: 뫼비우스의 띠' (1) | 2022.04.27 |
야마우치 겐지 '안경 부부의 이스탄불 여행기' (1) | 2022.04.22 |
모리모토 가오루 '여자의 일생' (1) | 2022.04.21 |
스타니스와프 이그나치 비트키에비치 '폭주기관차' (1) | 2022.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