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희곡

야마우치 겐지 '안경 부부의 이스탄불 여행기'

clint 2022. 4. 22. 06:44

 

 

<안경 부부의 이스탄불 여행기>는 여러 의미에서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 작품에는 이스탄불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스탄불로 여행가자는 대화만 나올 뿐, 도쿄 부근에 있는 어느 아파트 203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단지 왜 이 부부가 이스탄불로 떠나기로 했는지를 보여준다.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등장인물이 안경을 쓰고 등장한다는 점이다. 희곡에 전원 다 안경을 쓰고 있다는 언급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오묘한 공연 사진을 본다면 이 이야기가 평범한 일상극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정작 이 작품은 매우 리얼한 일상 공간을 무대로 하면서도, 마치 판타지 같은 세상을 보여준다.

연극은 아키코라는 한 여자가 집에서 울고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오랫동안 키우던 고양이 머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픈 고양이를 더 잘 보살폈어야 한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너무나 큰 슬픔이 그녀를 고립시킨다. 장례 절차를 알아보며 이성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남편 데루유키에게 그녀는 화가 치밀어오른다. 그리고 급기야 이상행동을 보인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그녀의 변화를 지켜보는 관점이 아니라, 거꾸로 그녀의 관점을 통해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 시공간의 흐름이 비논리적으로 전개된다. 이 희곡을 쓴 야마우치 겐지는 불륜 드라마와 베쓰야쿠 미노루식의 부조리극을 뒤섞고 루이스 부뉴엘 같은 초현실적 유머를 만들고 싶었는데, 처음 성공한 것이 이 작품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다른 작품들도 낯선 유럽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데, 특히 이 연극이 더욱 특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연시기의 영향도 있었던 듯하다.

 

 

이 작품은 20115월에 공연되었다. 3월에 대지진이 있고 뒤이어 원전 사고가 터진 당시, 동일본 전역은 전기를 절약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지역별 계획 정전을 시행한다는 발표가 나고, 거리의 에스컬레이터가 멈추고, 역마다 조명이 어두워지는 와중에, 극장 문을 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속에서 이 연극은 기획되고, 연습을 거쳐, 관객을 만났을 것이다. 당연했던 일상을 빼앗기는 경험을 하고, 연극은 일부러 311일 직전을 무대의 배경으로 선택했다. 무대에는 3월의 달력이 놓여 있고, 부부는 11일 금요일에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자연스레 관객들은, 저들이 무사히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탈 수 있었을지를 상상한다. 그리고 극장 밖을 나오면서, 여전히 예전의 일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왜곡된 렌즈로 보는 것 같았던 연극 속 무대가, 극장 밖에도 이어져 있다.

그때의 그 감각은, 10년이 지난 지금과 맞닿아있다. 일상이란 언제든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이제 모두 잘 알게 되었다. 재난으로든 감염병으로든, 아니면 가까운 누군가를 잃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든, 세상이 뒤집힐 요소는 알고 보면 여기저기 지뢰처럼 깔려있다. 이 희곡 속 지뢰는, 고양이의 죽음이다. 어쩌면 남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아 보일 수 있는 상실이다. 함께 사는 남편에게서도 묘한 온도 차를 느낄 정도다. 집주인 부부에게는 그 슬픔의 크기보다 반려동물 금지인 아파트에서 그동안 몰래 고양이를 키워왔다는 사실이 더 충격적일 수 있다. 집주인이 위로해주려고 다가오는 것조차 괴기스럽게 묘사되는 것은 아마도 지금의 아키코에게는 타인의 상냥함조차 거북하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무례하고 무신경할 뿐인 이웃은 고양이 살해범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마치 한 건물에 살아도 두꺼운 벽으로 서로의 삶이 철저하게 분리된 아파트처럼, 아키코의 주변은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반대로, 그녀는 바로 이웃집에서 가정폭력이 행해지고 있는데도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슬픔과 고통은 나눌 수 없다고, 연극은 말하는 것만 같다. 그녀가 외롭게, 온전히 혼란을 감당하는 모습이 때로는 우습게 때로는 슬프게 표현되며,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또 깨닫게 해준다. 드물게도 마침 관객 모두의 일상이 한꺼번에 뒤집히는 일이 생긴 시점에서.

 

 

야마우치 겐지는 사실 연극인보다 CF감독으로 훨씬 더 유명하고, 많은 경력을 쌓아왔다. 그래서일까, 그가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기존의 연극에서 보던 것과 매우 다르다. 예를 들면, 데루유키가 현관문을 열어 이웃과 대화하는 장면에서는 들릴 듯 말 듯한 톤으로, 심지어 무대 밖으로 나가 말하게 되어 있다. 아예 얼굴이 나오는 작은 인터폰 화면을 상대로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도 있다. 여기까지 보면 극사실적으로 일상적인 행동을 무대로 옮긴 것 같지만, 갑자기 안방 문이 화장터로 이어지는 공간의 비약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이야기임에는 분명하지만, 아키코라는 안경을 쓰고 롤러코스터 같은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다시 첫 장면,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희곡을 이렇게도 쓸 수 있다고 보여주려는 듯한, 그 자유로움에 감탄이 나온다. 그가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한 것이 2004년부터니 <안경부부의 이스탄불 여행기>는 그의 연극 인생에서 중간쯤에 있는 작품이다. 그의 극단 작업으로는 10번째 작품이었다. 이후 연극계에서 그의 이름이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2014년에 공연된 <3개의 그로테스크>가 기시다 상을 받으면서다. 이후, 2016년에 이 작품은 <앳 더 테라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희곡을 그대로 영화로 옮긴 것으로, 작가가 직접 영화감독을 맡았다. 어느 회사 임원의 홈파티를 배경으로, 그 저택의 테라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상류층 성인들의 잡담으로 꽉 채워진 대화극인데, 추하지만 솔직한 인간의 본성 같은 것을 마주하게 해준다. 특히 우리가 평소 남들 앞에서 어떤 식으로 연기하고 자신을 감추고 방어하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어른들을 위한 코미디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효율의 우선>(2013)도 눈여겨볼 만한 블랙코미디다. 어느 회사 기획부를 배경으로, 온갖 마케팅 용어와 냉정한 비즈니스 세계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굉장히 사사로운 인간관계들이 얽히고 설키며 결국에는 살인으로 이어진다. 그것도 두 명이나. 사태가 수습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자 사무실은 멈춰버리지만, 전무이사가 등장해 그 살인의 흔적마저 노련한 실무 감각으로 처리하고, 남은 회사원들은 다시 평정을 찾으며 막이 내린다. 마냥 웃으며 볼 수 없는, 현대인의 씁쓸한 삶이 적나라하게 그려진 연극이다.

202112<백신의 밤>으로 스물다섯 번째 연극을 선보인 그는, 어느 새 연극계에서도 마니악한 그만의 세계를 쌓아왔다. 모두 직접 공연을 보지 않으면 어떤 이야기일지 상상하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개성 강한 그의 작품 중에서 <안경부부의 이스탄불 여행기>는 처음 도전해보기에 적합한 희곡이 되어줄 거라 믿는다.

야마우치 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