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앙 젤레르 작 <아들>은 <아버지>, <어머니>를 잇는 작가의 가족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질병’과 ‘가족’이라는 테마는 3부작 모두를 관통하고 있지만, 이번 작품 <아들>은 전작들과는 다소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연극 <아버지>와 <어머니>에서 작가는 극중 환자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의사나 가족의 시선, 곧 관찰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관점에서 극을 진행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이 겪는 혼란과 두려움을 1인칭의 시점에서 느낄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들>에서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시선으로 우울증을 앓는 아들 니콜라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첫 장면에서 니콜라의 엄마 안느는 전남편 피에르에게 아들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그토록 착하고 다정했던 아들이 왜 저렇게 변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피에르 집으로 옮겨온 니콜라는 언뜻 전보다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똑같은 문제를 일으키고, 흥분한 피에르는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소리치며 안느와 똑같은 말을 한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중간중간 니콜라가 사는 게 버겁다거나 더는 견디기 어렵다며 자기 속내를 이야기하긴 하지만,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니콜라가 왜 저러는지, 무엇 때문에 저렇게 우울하고 아파하는지 명확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피에르와의 언쟁 속에서 예전에 아빠가 자기와 엄마를 버리고 떠난 것이 커다란 상처로 남았음은 짐작할 수 있지만, 오로지 그 이유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렇듯 작가는 의도적으로 작품 속에서 니콜라가 겪는 우울증의 원인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빠도, 엄마도, 새엄마도 마지막까지 이유를 알 수 없으며, 심지어는 병원에서 만난 의사도 치료의 중요성과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뿐 병의 원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는 무대 위 공간을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안느의 집, 피에르의 거실과 부엌, 병원 등 다양한 공간으로 사용되는 주 무대는 활짝 열려있는 데 반해 무대 한쪽에 붙어 있는 니콜라의 방안은 결코 객석 쪽으로 보이지 않는다.
저 굳게 닫혀 있는 아들의 방은 그 자체로 니콜라의 내면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방 밖에서 사람들은 걱정하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 방 속으로, 우울증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그들의 내면으로 들어가 볼 수 없다. 어차피 우리는 그의 방으로, 즉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볼 수 없기에 결코 그를 이해할 수 없다. 작가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니콜라의 우울증보다는 오히려 아들의 우울증에 대처하는 안느와 피에르의 모습이다. 온갖 노력을 다함에도 결국 아들을 지키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가족의 의미와 한계를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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