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날씨는 차고 건조하다. 이런 계절엔 아침마다 로션을 잔뜩 바르고 길을 나서보지만 손은 무기력하게 쩍쩍 갈라지기 일쑤다. 갈라짐. 틈새. 사람들은 이 계절 마냥 건조하기 짝이 없는 도시를 이리저리 순례한다. 아니 어슬렁거리며 배회한다고 하는게 더 적당하리라. 마치 삼류 에로배우같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혹은 목소리만 쓸쓸하게 요란한 교성으로 끊임없는 자기 복제를 통해 성장을 멈추지 않는 이 도시의 폐부를 향해. 그런데 얼핏 견고해 보이는 이 콘크리트 도시가 어느 한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라도한다면? 사람들은 급히 손을 내 젓는다. 그런 상상은 볼온하다고 진실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연극 '애벌레'는 이처럼 불안한 모습, 불온하기 짝이 없는 그런 상상으로 관객들에게 다가온다. 등장 인물들은 이를 반영하듯 모두 맨발로 무대에 서며(극을 진행하는 역할의 '필자'는 물론 맨발이 아니다) 아들 L은 시작부터 "당신들은 지금 누구를 보러 오셨죠?"라며 관객을 향해 냉소적으로 쏘아붙인다.
'애벌레는 잘려진 남성 성기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과거를 연장해 살아가는 세대와 새로운 미래를 살아가는 세대와의 결별과 화해를 그림으로서 가족의 갈등과 부정의 상징을 정화해 냅니다.' 1백대 1의 높은 경쟁률을 뚫고 당선한 이 작품은 '오직 연극만이 가능한, 다른 예술 장르로는 도저히 표현 불가능한 연극적 특성이 있다'(극작가 이강백), '소재도 파격적이고 글쓰기도 파격적이다'(극작가 이만희)는 심사 위원들의 극찬을 받은 동시에, 삼성문학상 역대 최연소(20세) 수상이라는 등의 화제를 낳았다. 자신의 동성애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는 엄한 군인인 아버지, 그리고 겉으로는 완벽하게 행복한 가정이 깨어지는 것이 두려워 애써 그 사실을 외면하는 그의 부인과 어들. 결국 아들이 자신의 동성애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아버지는 자신의 파트너와 자폭해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연이어 터지는 충격적 증언 등 이 작품은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 여기에서 제공되는 대본은 현재 공연되는 극의 대본이 아니라 99년 삼성 문학상 수상 원작입니다.
<작품내용>
아버지의 동성애를 둘러싼 가족의 갈등을 악몽처럼 그려낸다. 어느날 아버지가 수류탄으로 자살한다.
남은 가족들은 저마다 아버지의 자살 원인을 추리한다.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했던 가족들이 독백하듯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반추하는 과정을 통해 아버지의 진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가 양팔과 양다리가 잘린 비참한 몰골로 나타나자 가족들은 경악하는데...
아직 어린 애벌레는 무슨 촉수로 세상을 만날까. 변태와 탈피를 거쳐 성충의 눈으로 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임태훈 작 성준현 연출의<애벌레>(동숭아트센터 소극장, 12월 10일까지)는 한 소년의 '세상에 대한 눈뜸'을 그의 가정의 '엽기적 사건'을 통한 고통의 '허물벗기'로 표현한다. 아직 애벌레에 불과한 한 소년이 처한 엽기적 사건을 작가와 연출은 아주 냉정하게 한 꺼풀씩 관객 앞에 드러낸다. 그러나 그들의 연극만들기는 애벌레의 고통만큼이나 정성과 열정이 배어 있다. 연극의 구조는 크게 극중극의 얼개를 하고 있다.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의 이야기를 작품화하는 한 작가의 작가노트가 포괄구조로서 그 안에 담긴 사건의 내막이 각 장면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작품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흔히 볼 수 있는 서사체의 이야기 전달 방식이 아니라, 추리극의 형식과 복합적인 시간의 구성을 통하여 작가는 17세 소년 L이 처한 비극적 사건을 우리 모두 지닐 수 있는, 성인 세계를 향한 '통과 의례'의 과정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기름 폭발로 인한 화상으로 상반신만 남아 겨우 숨만 쉬고 있을 뿐인 아버지를 살해한 죄목으로 구속된 소년 L, 과연 그는 엽기적인 패륜아인가, 연극은 그러한 L의 진술을 따라 장면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 진행 과정 속에서 그의 어머니, 고모,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 등의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이 개입된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다분히 서사적이다. 마치 장(章)을 달리하여 주인공의 시점이 변화되는 소설처럼 이 연극은 같은 사건을 대하는 다양한 시선을 드러냄으로써 사건의 본질을 더욱 객관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외부의 시선이란 다시 소년의 내적 갈등의 깊이를 가늠해 주기 위한 보조 장치일 뿐이어서 왜 그가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의 이유를 드러내 주기에는 여전히 미흡하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아버지의 감추어진 관계에 있을 터. 아버지가 동성연애자라는 것을 안 소년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자살 미수에 이르게 하였다는 죄책감, 그러나 아버지로 알고 있었던 상반신만 남은 몸뚱아리가 사실은 아버지의 사랑의 대상이었던 남자라는 것을 뒤늦게 안 소년의 복수심 등은 결국 소년의 가족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 그러나 이러한 소년의 갈등의 깊이가 제대로 보여진 것일까. 작품의 또 하나의 커다란 갈등의 축은 역시 아버지와 아들. 이 작품의 아버지는 육군 연대장 대령의 계급을 지닌 전형적인 군인이다. 군인정신으로 무장해 온 30여 년 경력의 육군 대령이 동성연애자이고 사랑의 파트너인 부하 소대장과의 정사(情事)가 발각되자 순간적으로 자살을 감행한다고 하는 이 '황당한'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작품은 이러한 복잡한 심리 구조를 언어로 설명하기보다는 장면으로 보여주고자 한다. 이 점에서 연출의 노력은 값지다.
희곡 속에서 울려 나오는 많은 시적(詩的) 대사들을 적절히 조절하면서 그것을 3차원의 이미지로 재생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이나, 장면 구성에서의 연출의 노력은 돋보였다. 마치 비디오 테이프의 '되감기-정지-재생'을 반복하는 것과 같은 동일한 사건의 시간적 재배치를 통해 추리극의 현장으로 자연스럽게 관객을 동참시키는 구조도 참신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요 장면을 슬로우 모션으로 확인하는 재미 역시 즐거웠다. 이 앙상블은 배우들의 연기 훈련이 충분히 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져다 준다. 아버지 역의 신신범의 대사 한 마디 없는 연기는 오히려 이 연극의 압권이다. 만약 그에게 대사가 단 한마디라도 주어졌더라면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엽기적'인 일이리라. 그러나 상대적으로 소년역의 송흥진은 앳된 애벌레로서의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첫 장면부터 이미 그는 무엇인가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을 것 같은 '불량소년'의 이미지를 띠고 있어서 그가 마지막 장면에서 '피를 정화한 물'로 자신을 씻고 애벌레의 허물을 벗기까지의 변화 모습이 깊이 있게 다가오지 못했다. 이 점에서 엄마 역의 이양숙의 연기도 아쉬움을 남긴다. 그녀가 취하고 있는 이중적인 행동(남편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정을 지키려는) 속의 갈등이란 처음부터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시종일관 어두운 얼굴로 소년의 뒤에만 자리할 뿐이다. 어쩌면 이 연극의 희곡이 지닌 가장 큰 아쉬움이 될 것이다. 이 작품에는 엄마(아내)의 시점이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작품에서는 소년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남자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갈등과 선택의 과정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일부 진술만 남을 뿐, 소년의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 없다. 단 한 장면 어느 날 새벽 엄마의 품 안에서 엄마의 젖을 빨면서 엄마와 고통을 함께 나누고 평온을 되찾는 장면 정도가 아닐까. 그러나 이마저도 아쉽게도 엄마의 연기는 넉넉하지 못하였다. 극중인물 속으로 충분히 빠져들지 못한 것은 아마도 그녀의 용기 없음 때문이 아닐까. 무대장치의 구성은 신선하였다. 무대 중앙 후면에 자리한 환자 형상의 소품이 주는 괴기스러움과 그 공간을 이용한 다양한 장면 구성, 이를테면 새떼의 등장, 아버지의 이미지와의 오버랩, 살해 순간의 피범벅 등, 그리고 그 양옆의 무대 바닥으로 흐르게 만든 핏물의 통로, 그리고 무대 중앙 거울과 그 아래에 고인 맑은 물 등, 이들은 모두 동숭아트센터 소극장의 열악한 무대 조건을 나름대로 충분히 고민하여 만든 땀의 흔적들이다. 젊은 작가와 연출가가 함께 만들어낸 멋진 앙상블, 이들이 한국연극의 발전에 기여할 앞날을 기대해 보는 것, 이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즐거움인가. 이 스산한 겨울의 문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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