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희곡

김정숙 '바리'

clint 2016. 11. 18. 14:58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 무속신화인 '바리데기'는 한국 무속의 진오귀굿(죽은이의 한을 씻기고 좋은 곳으로 보내기 위해 망자의 가족이 무당을 불러 벌이는굿)에서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바리공주에 대한 무가(巫歌). '바리데기'는 희생을 통해 죽음을 이긴 여성 영웅신화다.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황천강가에 버려진 바리가 15년 후 아버지 오구대왕이 병들자 저승으로 가서 갖은 시련 끝에 생명수와 되살이 꽃을 구해 죽은 아버지를 소생시킨다는 내용. 바리의 저승 여행은 고난의 민족사뿐 아니라 현대인들이 겪는 인생 역정과도겹쳐진다.

 

 

 

 

 

드라마조차 빨아들인 창조적 무대
- 서울예술단의 뮤지컬<바리-잊혀진 자장가>샤머니즘의 바리데기 이야기가 현대의 뮤지컬 작품<바리-잊혀진 자장가>(1999.1.9-24,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로 거듭나면서 화제가 되는 까닭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말할 나위도 없이 이 무조(巫祖) 신화가 뮤지컬이라는 예술 장르로 담겨진 양식의 측면이다. 둘째는 이야기의 서사적 도입과 결과에 현대의 버려진 아이들, 그것도 외국가정에 입양된 아이들이 버려진 상태로 적응하지 못한 채 자기 스스로를 다시 버릴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졌다가 긴 방황 끝에 자기 실현과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찾는다는 신화의 재해석이 특이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 뮤지컬들이 천박한 대중문화의 악극류나 미국 브로드웨이식의 뮤지컬, 아니면 전통적 창극류로 한정되는 마당에 뮤지컬<바리-잊혀진 자장가>는 오페라 취향의 음악성이 두드러진다. 브로드웨이식이라기보다 유럽풍의 성향이 강한 음악이 고전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고전적인 분위기는 미술장치와 조명이 만들어내는 창조적 무대 디자인의 신화적·마술적 분위기와 맞아떨어진다.
무대 디자인은 처음부터 박사(薄紗) 너머로 신비한 신화세계에 이르는 블랙홀 구멍에 생명의 꽃을 피우고, 그것은 빛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창출한다. 세기말의 이국도시 뒷골목의 어둠, 회전무대 위에 펼쳐지는 신화적 왕국의 다층적 구조의 스산함, 지하세계의 미로 같은 녹슨 청동거울 이미지, 생명을 상징하는 물빛의 서천 꽃밭, 이러한 창조적 무대 디자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면서 전체적으로 뮤지컬, 연극의 총체적 작품으로 살아난다.
비로소 극장 무대 위에 위대한 앙상블이 이루어진다. 라이트 모티브로서 바리와 왕후의 주제가 몇 장면에서 더 강조되었더라면 솔로나 이중창 합창 등으로 뮤지컬의 몇 부분들이 그대로 대중적 기호와 맞아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특정 음악의 어법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연성을 갖고 서정적 친근감을 준 1막의 전체적 흐름에 반하여 2막에서는 한국 전통음악의 보편성이 강세를 취한다. 그것은 저승편력의 신화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것이다. 현대적 감성과 전통적 몽상의 세계를 넘나들게 하는 음악(작곡 원일, 음악감독·지휘 김정택, 편곡 박준능, 성악지도 김수웅)은 드라마로서의<바리-잊혀진 자장가>의 현재적 감성과 전통적 신화세계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바리공주는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버림받은 일곱 번째 딸이다. 그러나 이번 작품의 도입부분은 뉴욕과 같은 현대 도시문명의 뒷골목과 청바지 세대 간의 배신과 이별로 긴장을 몰아간다. 바리 보우만은 낯선 땅으로 입양된 계집아이,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양부모마저 그녀를 버렸고, 마침내 애인 토미마저 그녀를 버렸다. 버림받은 그녀가 이제는 세상을 버린다. 자기가 자기를 버림으로써 세상을 극단적으로 저주하는 바리는 투신자살을 꾀하고 신화세계로 들어선다.
그 신화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현대의 도시환경이 신화의 왕궁으로 바뀌면서 그녀를 버렸던 아비와 어미가 그녀를 버린 죄값으로 긴 세월 동안 앓아왔음을 알게 되는 줄거리는 바리데기 신화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작품(원작 홍원기, 각색 김정숙)에서는 죽어가는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그림도형 같은 인물상이 자식을 버린 한 맺힌 부모상으로 승화되고 여섯 공주와 부마들의 권력쟁탈의 음모가 정치극 형식으로 펼쳐진다. 바리가 저승으로 생명의 꽃과 약수를 얻으러 가는 까닭은 부모는 그녀를 버렸지만 그 고통을 가슴에 새기고 결코 그녀를 잊어버리지 않았음에 기인한다. 버림받고 잊혀진 여인이 가장 비극적인 여인인 것이다. 바리는 버림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버린 부모가 불치의 병에 걸릴 정도로 그녀를 잊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버림받음으로써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한 것이 된다. 그리하여 서천으로 떠나는 2막의 로드플레이는 우리의 신화적 저승세계를 환상적으로 구체화시킨다. 바리데기 신화가 우리 정서의 예술적 원형인 것은 줄거리 자체가 시련과 극복을 통한 이니시에시션(入巫式,성년식) 과정을 그대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식 자체라면 바리데기 이야기는 지나간 과거의 허술한 그림자일 뿐이다. 바리공주 소재가 한국 예술의 각 장르에서 쉽사리 다루어지면서도 제대로 고전으로 정착하지 못한 것은 과거를 과거로만 겨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리데기 설화의 현대화는 소재를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있고, 그 현대화된 바리공주의 주제를 바로 우리 시대의 예술적 총체성으로 살려내는 데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바리-잊혀진 자장가>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버려진 아이, 외국입양아의 문제와 연계된 정체성 탐구를 신화세계와 맺어 주었다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신화세계에서의 시련의 과정 자체가 현대적인 정체성의 탐구와 맥락을 같이하여 결코 동떨어진 지난 과거의 단면을 보여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니시에이션의 시련과정이 탐색의 과정이며, 시련을 극복해 나가면서 주인공은 무엇인가 하나씩 깨닫게 된다. 그것은 성장을 뜻한다. 그것이 바로 정체성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리데기 이야기를 부모를 살려내는 지극한 효의 행위로 간주하는 것은 유교적 이데올로기의 발로이다. 그만큼 샤머니즘이라는 고졸(古拙)한 원초적 신앙체계도 유교사상이라는 통치이념으로 물들어 있다.

 

 

 

 

 

서천의 미로를 헤매던 바리는 빨래 봉사, 길 닦음 봉사, 그리고 황천강 체험, 지옥 장면 등으로 해서 내적으로, 인간적으로 크게 성장한다. 시련은 인간을 성숙시킨다. 바리는 그만큼 이기(利己)에서 이타(利他)의 경지로 들어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천문을 열고 마지막 시련을 거두어내면서 다시 무장승의 아이들을 낳아주어 그를 하늘나라로 돌려보낸다. 자기를 버렸던 애인 토미의 마음마저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성숙한 바리는 개안초, 다부살이, 생명수로 마침내 죽은 아버지를 살려내고 그 긴 여정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녀는 이제 바리공주가 아니라도 좋고, 버림받고 입양된 먼 이국 뒷골목의 코리언 처녀 바리 보우만이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신화적 편력의 역사는 현대의 삭막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녀는 남을 돕는 가운데, 자기를 다시 발견함으로써 잃었던 ‘나’를 찾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리공주가 다시 초두의 어두운 뉴욕 거리의 바리 보우만 의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이 퍽 상징적이다. 공주의 옷을 벗고 – 다시 말하면 껍질을 벗고 한 겹 재생한 탈피과정을 겪고 그녀는 바리 보우만의 현실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이제는 울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다.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찾았으므로 이제 결코 자기를 버리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현재적 해석을 위하여 효과적으로 동원된 드라마 작법, 음악, 안무(안애순), 연출(김효경)력 등은 총체적 제작지휘를 맡은 신선한 무대 디자인의 흡인력 속에 융화된다.
<바리–잊혀진 자장가>에서 가장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창조적 무대 디자인의 흡인력이다. 그것은 어쩌면 체코 프라하의 ‘마지카 라테르네’ 극단 무대미술의 강력한 이미지 형성 능력과 비슷하다. 처음부터 관객들은 마술세계로 빨려 드는 조명과 미술의 합작에 전혀 새로운 관극 체험을 하게 된다.
극장예술은 무대의 예술이고, 당연히 드라마나 음악이나 의상이나 무대장치나 조명 등은 총체적으로 앙상블을 이루게 되어 있다. 그 당연한 이치가 잘 통하지 않는 것이 우리 공연예술계의 통폐라 할 것이다. 그 통폐를 ‘그렇지 않다’라고 한번 크게 거부한 것이 이번 서울예술단의 뮤지컬<바리-잊혀진 자장가>이고 그 거부의 몸짓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게 대세를 몰아간 부분이 무대미술과 조화를 이룬 조명의 효과이다. 이 작품에서는 미술과 조명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완전히 하나로 디자인되어 있다. 그런 조화 속에서 음악을 끌어들이고 안무를 흡수하고 마침내 드라마와 연기를 그 커다란 창조의 블랙홀 안으로 빨아들인다.
한국의 뮤지컬도 이만큼 각 장르가 협조하고, 앙상블을 이룬다면 세계적인 수준의 단서를 달 까닭이 없다.<바리-잊혀진 자장가>는 결코 지난 과거의 신화도 아니고, 시세를 따르는 악극 뮤지컬도 아니다. 그것은 당당한 현대 한국의 ‘예술상품’이다. 상품이 다량매체 시대의 언어 오염 때문에 때묻어 버린 낱말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글로벌 시대의 세계시장에서 우리의 문화예술을 내세워야 한다는 당위성만 요란스런 구호를 무색하게 하는 이런 예술적 창조는 아무리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
버려진 바리공주는 우리의 분신이다. 우리는 버려진 바리데기의 아이덴티티(정체성) 찾기 여정에 동참하면서 그 과정에서 겪는 갖가지 시련의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성장해가며 우리의 운명을 개척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바리데가 무조(巫組)가 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여 새로운 문화영웅으로 탄생하는 우리의 분신, 바리 보우만을 눈여겨보게 되는 것이다.
무대 위의 주인공 바리는 그녀가 걸어가는 길목에 우리를 세워두고 그녀가 겪는 시련에 우리가 동참하기를 기다린다. 그녀를 중심에 두고 서사적인 이야기와 서정적인 음악과 현대적인 안무와 연기들이 무대장치와 조화를 이룬 조명(최형오)의 흡인력으로 우리를 현대와 신화세계에 넘나들게 만들어 준 것은 그만큼 우리 공연예술계에도 가능성이 있다는 반증이 된다.
뮤지컬 작품이 브로드웨이식 팝과 재즈 음악의 강력한 비트 가락으로 성공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국이나 프랑스식 오페라의 중후한 맛이 밀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국식 뮤지컬을 지향하는 경우에는 한국식 코러스 안무 방식도 기대해 볼 만 하다. 그것은 결코 농악대나 각설이타령식이 아닌 세련된 현대 한국무용의 새로운 뮤지컬 안무 방식이 될 것이며, 이번 공연이 그런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변창순의 의상은 신화적 세계를 지향하는 만큼 무거워진 것이 흠이었다. 무대미술과 조명이 선도한 공연이었던 만큼 의상이 그 비중에 있어서는 처졌지만 다양한 변화와 기능에 적응하는 노고가 돋보였다.
뮤지컬은 일종의 중간 양식(박용구)이라서 대중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따라서 스타의 발굴과 육성은 의도적이라 해도 탓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공연에 스타의 탄생이 없었다는 것이 아쉽다.<바리-잊혀진 자장가>에서 이선희의 바리공주 역은 몰라도, (필자가 본)임선애 바리공주는 스타의 무르녹은 매력이 아직 조성되지 못했다. 어쩌면 어린 탓으로 훗날을 기약할 수는 있겠지만 뮤지컬<바리-잊혀진 자장가>에서는 왕후 윤복희의 가창력이 돋보일 뿐 마별사(유인촌, 박철호), 무장승(유희성, 유열)의 캐릭터는 작품 속에서 이미 그 재능이 제한돼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재정적 지원이 있어도 ‘작품’이 만들어지기가 어려운 우리 문화환경에서 돈들인 만큼 그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울예술단의 뮤지컬<바리-잊혀진 자장가>는 새로운 예술적 이정표를 세웠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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