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을 모티프로 삼은 서사는 신화에 기원을 둘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닌다. 나라와 민족마다 고유한 세계의 창조나, 신 또는 신적인 영웅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는데, 그 안에 변신 모티프가 많이 담겨 있다. 로마의 작가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의〈변신〉(Metamorphosis)은 변신 모티프가 담긴 서양의 설화집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 신화를 중심으로 하여 소아시아와 로마의 설화를 다룬 방대한 서사물이다. 신, 영웅, 인간의 시대를 차례로 기술한 이 책은 제목이 암시하듯 변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리로 둔갑한 뤼카온, 월계수가 된 다프네, 암소가 된 아르고스, 갈대가 된 요정 쉬링크스, 백조가 된 퀴크노스, 섬이 된 페리멜레 등 변신에 관한 이야기는 동물, 식물, 광물 등 세상의 사물들이 존재하게 된 정황을 다룬 일종의 사물 유래담 또는 기원담이다. 이 이야기들은 근대의 합리적 이성으로 포섭되지 않는 초월적인 신들의 세계 안에 거주한다. 인간의 이야기가 다루어졌다고 해도 신의 영역에 도전하거나 그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점은 무엇보다도 이 책의 제6부 ‘신들의 복수’에서 구체화되는데, 신에 대한 불손이 인간에게 얼마나 무서운 재앙을 초래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미네르바 여신과 베짜기를 경쟁한 아라크네는 저주를 받아 거미가 된다. 니오베는 레토 신을 폄하하고 오만함을 드러내어 자신의 남편과 자식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잔혹한 죽음을 목격하며, 자신은 바위로 변하고 만다. 결국 신들의 복수담은 신들의 무소불위의 권능을 강조한 것이지만, 변신과 관련하여 중요한 속성이 드러난다. 즉 인간의 변신은 인간 자신이 욕망을 발현시켜 변신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의 대립 관계에서 징벌의 대가로 주어진다는 것이고, 그 결과가 처참한 비극의 결말이어서 신에 대한 예속성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변신을 명령하는 신은 신화가 지배하는 시대의 지배적 가치인 동일자이고 신에게 대항하는 인간은 신들에게 억압받는 타자가 된다. 이 대목에 이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리스의 고전 비극인 소포클레스의<오이디프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작품 속에 변신 모티프가 담겨 있지는 않지만, 극중의 오이디프스 역시 불길한 신탁을 거부하지 못하는 파국을 맞이하는 타자가 되고 만다. 신화적 서사는 이런 점에서 변신을 다룬 근대의 서사물과 비교하여 논의될 만하다. 그리스 신화를 숭배하던 19세기 이전 시대에서의 인간과 신의 관계는 근대 사회에서의 인간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일정하게 대응하기 때문이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설화의 시대에 존재하는 무소불위의 인격신은 없고 다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근대의 메카니즘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며 작동한다.
고선웅 작<황금박쥐>(연우소극장, 2003.10.3-11.30)는 변신과 관련하여 근대 사회, 구체적으로 말해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된 타자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소시민이 황금박쥐가 되어 비상한다는 내용이다. 기차 기관사인 왕기는 결혼하였으나 불임증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고 게다가 성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소심하게 생활하는 소시민이다. 어느 날 우연히 지하철 터널 속에서 박쥐를 발견하면서 박쥐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힌다. 환상의 집착은 불만으로 가득 찼던 그의 억압된 무의식과, 의식의 일상을 점차 바꿔놓는다. 그의 의식과 무의식은 가정과 사회의 두 가지 방향으로 균열되어 나간다. 집밖에서 그는 낯선 타인들에게 시비를 걸고 따지고 싸운다. 새들이 비행기에 부딪쳐 죽는 것을 예사로 아는 국내 여객기 비행사에게 시비를 걸고 “멍청이!”라고 놀린다. 멍청이란 표현에는 비행사의 조종 미숙으로 인해 새가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당한 것에 대한 짙은 연민이 깔려 있다. 또한 그는 친구의 애인과 함께 성적으로 즐기자는 한 청년의 천박한 언사를 따져 물으며 성의식의 문란함을 비난한다. 타인들에 대한 냉소와 조롱은 그가 황금박쥐와 같은 신체적인 조건을 갖추게 되면서 기괴해진다. 맑은 정신으로는 도저히 나날을 견디기 힘든 소시민성은 술의 힘에 의존하여 세상의 어리석음과 타락함을 질타한다. 특히 그가 수면시에는 몸이 차갑게 되고, 그와 성관계를 가진 아내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임신하게 된다는 ‘지연 착상’의 사실로부터 그의 신체가 박쥐의 신체와 닮아가고 있다는 기괴성이 강조된다. 아놀드 하이트지크(Arnold Heidsiek)는 기괴성이 수용자에게 우스꽝스러움과 섬뜩함을 동시에 주는 것이어야 하고, 철저히 현실에 뿌리박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황금박쥐〉의 기괴성은 아놀드 하이트지크가 언급한 기괴성의 전제에 비교적 충실하고, 변신 모티프를 다룬 근대 서사의 맥락에 닿아 있다. 기괴성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근대 소설의 전범인 프란츠 카프카의〈변신〉이 그러하고, 새처럼 변신하여 비상하려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기괴성을 다룬 이상의〈날개〉또한 그러하다.
집안에서 그는 불임증으로 정신적 압박을 받게 되자 아내에게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 아기를 낳자고 권유한다. 종족 보존 의식의 전근대적 표상인 여성의 ‘씨받이’ 풍속은 남성의 ‘씨주기’ 행위로 전환된다. 성별의 차이는 있지만 둘 다 종족 보존의 관습에 억압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그런데 ‘씨주기’ 행위는 단순히 이러한 풍속의 차원보다는 의식과 무의식의 심리 차원에서 주인공을 지배하고 있는 성(sex)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그는 직장의 동료와 상사에 비해 성기가 작고-외견상 확실하게 구분하여 연출된다-성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술집에서 바텐더의 친구로부터 들려오는 불륜적인 성적인 대사에 시비를 건다. 그의 냉소와 불만, 그리고 세계와의 부적응성은 신체의 결함으로 인한 리비도적 욕망의 결여에 있다. 그가 보기에 이 세상은 불건강한 쾌락으로 넘쳐 있고 타락해 있다. 취중에 하는 그의 냉소적 언행은 그의 단단한 의식의 틈으로 솟아나는 무의식의 표출이다. 그가 사회에 갖는 불만은 자본주의의 제어할 수 없는 쾌락의 과잉에 있지, 쾌락과 욕망을 가두는 도덕과 윤리에 있지 않다. 따라서 아내와 다른 남자의 성관계를 허용한 행위는 겉으로는 불륜적인 기행처럼 보였을지라도, 곧 후회하여 돌이킬 수밖에 없는 더러운 짓과 상통한다. 그는 그 결과로 생긴 아기를 의심하고 아내를 부정한 시선으로 보기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자 부조리다. 역설적이게도 그의 기행의 이면에는 새의 죽음을 슬퍼하는 남다른 동정심과 세상의 타락을 냉소하는 도덕적 순수주의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의 기괴한 행동들은 성적으로 억눌린 무의식의 일탈적 행위로 요약된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고 세상을 불순한 적으로 간주했을 때, 그러한 세상에 적응하거나 화해의 손을 내밀지 못했을 때, 일탈의 욕망은 환멸로 가득 찬 현실의 공간을 빠져나가고 만다. 현실의 도피는 유토피아적 낭만이다. 현실을 도피하여 펼쳐지는 또 다른 세상은 현실 비판을 통한 대안적 세계가 아니라 막연한 유토피아의 세계다. 일탈의 충동을 지닌 주인공이 극중극〈wing〉을 보았을 때, 그는 무대 위에서 새(鳥)로 등장하는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나아가 황금박쥐의 의상을 입고 순진한 연극단원과 함께 비상하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현실을 빠져나가 타락의 공간인 술집의 창문을 통해 뛰어내린다. 황금박쥐로 변신하여 비상하는 행위는 주인공 왕기가 속해 있는 영토로부터의 일탈이다. 그의 영토성은 무대의 미학으로 좀더 상징화된다. ‘ㄱ’자 모양의 무대는 벽과 바닥이 모두 동일하게 짙은 갈색의 쪽마루로 길게 이어져 유폐된 세계임을 강조한다. 지하철의 터널과 방안은 주인공의 유폐된 내면 공간과 대응하고, 술집은 주인공이 대면하는 타락한 세계와 대응한다. 창문을 통한 주인공의 비상은 내면과 외면의 양분된 세계를 명료하게 갈라놓는다. 답답하고 억압적인 현실 세계와 탈출하여 비상하고 싶은 상상의 세계. 소심하고 나약한 한 소시민의 비상은 관객들의 억눌렸던 일탈과 해방과 비상의 욕망을 어느 정도 대리충족 시켜준다. 그런데 문제는 그 비상의 끝이 과연 어디인가 하는 것이고, 정말로 무엇이 그로 하여금 비상하게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비상의 끝 또는 목적지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은 바꿔 말해 주인공의 영토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과 같다. 주인공이 속해 있는 영토에 관한 논의는 이 작품의 갈등과 관련되어 있다. 이 작품의 갈등은 비교적 단순하다. 주인공이 아내와 낯선 타인들과 대립한다고 해서 복합 갈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복합 갈등은 실존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이 다양하게 주인공의 마음을 괴롭히는 데서 생겨난다. 단순한 갈등은 인물의 입체화에 근본적인 장애로 작용한다. 주인공이 여러 인물들과 대립하여도 대개 억압된 성과 관련된 것이다. 작가가 바라보는 이 사회는 무엇보다도 소비와 쾌락의 사회다. 성(sexuality) 담론이 유행하고 신문과 잡지에 누드가 유행하고, 인터넷에 포르노가 자유로이 떠도는 사회다. 돈으로 성을 소비하는 비도덕성이 난무하는 사회다. 작가의 이런 시선은 타당하다. 그러나 문제 의식은 좀더 분석적이고 진지해야 한다. 세상이 경박해지고 단순해졌다고 해서 작품마저 그대로 따라서는 안된다. 작가는 경박함과 단순함을 가능케 한 조건들을 탐구해야 한다. 또한 극화의 양식이 희극이라 하더라도 가벼움만 강조되어서도 안된다. 비극만이 진지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희극에도 희극적 진지함(Comic seriousness)이 있다. 희극의 소성은 관객의 감정에 불쾌한 찌꺼기를 남기지 않는 경쾌한 휘발성이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의 불쾌함을 모두 공중에 사라지게 하려면, 희극이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비극과 희극은 동전의 양면이다.
〈황금박쥐〉의 영토는 비교적 단순하다. 비상을 통한 영토의 일탈은 영토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던져주나 영토의 변화를 위한 희망을 던져주지는 못한다. 이런 점에서 비상하는 행위는 탈주가 아니라 도피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탈주는 영토의 일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일탈을 통한 영토에 대한 재사유와, 영토 변화의 창조적 실천 가능성을 담보하고 있다. 현실의 불만과 해방의 욕구 분출은 영토의 문제를 제기할 수는 있어도 영토가 지닌 지배적인 가치와 힘들을 흔들어놓지 못한다. 도피적 낭만주의는 얼어붙은 영토를 벗어나게는 해도 그 영토에 봄의 기운과 바람을 몰고 오지 못한다. 영토의 현실을 다양하게 천착하지 못할 때, 등단시부터 예사롭지 않았던 작가 고선웅의 언어의 장악력과 희극적 감수성, 인물 창조력은 퇴색하고 만다. 기괴성의 웃음은 씁쓰레한 부조리의 웃음이다.〈황금박쥐〉의 아쉬움은 바로 씁쓰레한 웃음이 갖는 기괴성의 매력이 약하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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