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작가나 섬세한 감수성을 갖고 읽어야지만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대다수의 작가는 그렇게 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어떤 작가들은 묘미는커녕 오해와 불신을 산다. 세기말 빈의 아르투어 슈니츨러가 그런 사람이다. 동시대의 동향인, 프로이트가 ‘우리들의 진정한 동료’라고 인정했을 정도로 슈니츨러의 소설과 희곡은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예리하게 파고든다.<윤무>라는 희곡이 재판에 회부됐다. 물리적인 행위로서 섹스를 무대에 올렸기 때문이다. 열 개의 장마다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등장하여 사랑의 행위를 벌인다. 그리고 한 장에 등장하였던 남자나 여자는 다음 장에 다시 등장하여 반대 성의 다른 사람과 성행위를 갖는다. 연극은 마지막 장에서 전 장에 등장한 남자가 첫 장에 나오는 여자와 같은 방을 사용하는 것으로 끝난다. 순환을 이루기에<윤무>이다.
<윤무>의 대사에서는 슈퍼에고와 에고와 이드가 경합한다. 그럼에도 단 한 마디의 음란한 대사도 없이 빈 사회의 전반적인 위선을 노출시킨 이 작품은 언어를 통한 소통의 불완전성이나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의 모습을 정교하게 그린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첫 무대 공연이 끝나고 재판이 열렸다. 멋진 스타일리스트 슈니츨러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 재판의 증언 속기록은 우리 시대에 대한 가장 멋들어진 풍자이다. 그 훌륭한 문서에 등장한 네다섯 명의 인물은 최고의 풍자가라도 더 위선적인 작중인물을 만들기 힘들만큼 위선의 전형이다.”
오늘날 성 개방을 찬미하기보다 타락한 사회에 사랑이 없음을 개탄하는 작품으로<윤무>를 이해한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은 돌고 돈다.

<윤무>는 1897년에 완성되었으며 창녀와 군인, 군인과 방 청소하는 하녀, 하녀와 젊은 남자,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 젊은 여자와 남편, 남편과 귀여운 소녀, 귀여운 소녀와 작가, 작가와 여배우, 여배우와 백작, 백작과 창녀라는 10개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슈니츨러는 1900년에 이 작품을 자비로 200권을 인쇄하여 비매품으로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친구들은 이 작품에 대해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한다. 루돌프 로타어(Rudolf Lothar)는 이 작품의 은밀한 매력을 열렬한 기쁨으로 읽었으며, 사랑의 헐떡거림에서 인간본성의 비꼬임을 재빨리 간파한 알프레트 케레(Alfred Kerre)는 이 작품의 ‘야릇한 힘’을 슈니츨러의 새로운 문학경향으로 보았다. 원래 이 작품은 <사랑의 윤무>였는데 케레가 <윤무>라고 하는 게 좋다고 해서 제목을 줄였다고 한다. 케레는 슈니츨러의 이 작품을 ‘소 데카메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1903년 빈에 있는 한 출판사에서 이 <윤무>를 초판에 4만 부나 찍어 슈니츨러를 유명하게 만들었으나, 새로운 오해에 처하기도 했다. 펠릭스 잘텐(Felix Salten)은 ‘아르투어 슈니츨러와 윤무’라는 글을 썼는데 슈니츨러는 이 친구의 글에서 자신이 대중작가로 평가받은 사실에 분노했다. <윤무>는 1904년 독일에서 출판 금지되었으나 출판 금지 후 은밀하게 전파되어 <윤무>에 대한 패러디까지 나오면서 ‘알려지지 않은 유명한 책’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1908년부터 벤야민 하르츠(Benjamin Harz)출판사가 <윤무>를 다시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열 규정이 오스트리아보다 엄격한 독일에서는 어느 출판사도 이 책의 출판을 시도하지 않았다. 1931년에 와서 피셔출판사가 이 책을 출판하게 되었으며, 101번째로 출판된 이<윤무>는 작가의 서문 없이 출판하도록 압력을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슈니츨러의 해설이 민족사회주의로 인해 강력해진 반유태주의를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윤무>의 공연사와도 연관이 있었다. 비매품으로 찍어 친구들에게 준 작품에 대한 논란 때문에 1897년 슈니츨러는 자신의 <윤무>는 상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1903년 6월 25일 독일에서 처음으로 이 책을 공식적으로 구할 수 있게 되자 뮌헨에 있는 아카데미 드라마협회는 4·5·6장만 상연했으며, 1912년에 비로소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헝가리어로 초연을 할 수 있었다. 1918년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검열이 사라졌으나 자칭 ‘도덕 방어자’라는 사람들의 반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에서도 심한 반대를 가져오게 되었다. 도덕성에 대한 염려로 인해 새로이 검열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시험공연이 있었다. 1921년 2월 1일 빈에서 시험공연이 있을 때 슈니츨러도 만족감을 보였고 비평가들은 비도덕성에 대해 아무런 반론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권당인 기독교사회당은 유태인 문학의 영향에 대하여 언급했으며 이 작품을 결국 ‘사창가 작품’이라고 명명했다. 가톨릭 단체는 ‘반 윤무 위원회’를 소집했으며 공연에 대해 경고했다. 2월 16일 공연에는 극장 내에서 반대파들과 이를 보려온 사람들 사이에 충돌이 있었고 마침내 공공의 안정을 위하여 공연금지라는 조치가 뒤따랐다. 1922년 3월 7일 <윤무>는 경찰청의 보호 하에 공연이 재개되었으며 6월 30일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 1921년 베를린의 <윤무>에 대한 형사소송은 무죄로 판결이 났으나 빈 극장에서 난투극을 직접 체험한 슈니츨러는 자신의 작품이 오해를 받는다는 사실과 반유태적 증오감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1922년 모든 공연을 거부했다. 저작권 때문에 그 후 <윤무>는 어느 무대에서도 공연될 수 없었다. 슈니츨러가 사망한 후 아들 하인리히는 이를 유언처럼 받아들였고 <윤무>는 1982년 1월 1일에 비로소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이후 새로운 연출이 쌓이고 쌓였으며 <라 롱드(La Ronde)>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는 영화화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6년에 <라 롱드>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공연되었다.
<윤무>가 1921년 오스트리아에서 초연됐을 때 외설 혐의로 재판에 회부됐을 만큼 등장인물들은 노골적이고 원색적인 대사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당시에 그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작품의 외설시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묘사하는 정확성 때문이었다. 독자들은 실낱같은 사랑의 희망을 때문에 끊임없이 다른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열 쌍의 연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인이 가진 불안과 모순, 섹스로의 도피를 폭로하는 그 묘사의 정확성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아르투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부유한 유태인 의학교수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역시 의학을 공부한 의사였다. 1886년부터 병원에서 일했으며 1893년부터 개업했으나, 생의 대부분을 작가로 활동했다. 작가 초기에는 주로 희곡을 집필했으며, 휴고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과 친구였고, 스스로 자신의 ‘정신적 도플갱어’라고 부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희곡으로는 <아나톨(Anatol)>, <사랑의 유희(Liebelei)>, <윤무(Reigen)>, <광활한 땅(Das weite Land)>, <베른하르디 교수(Professor Bernhardi)>를 들 수 있다. 만년에는 희곡보다 소설을 썼으며 대표적인 단편소설로는 <구스틀 소위(Leutnant Gustl)>, <엘제 양(Fräulein Else)>, <야외로 가는 길(Der Weg ins Freie)> 등이 있다.
그는 오랫동안 도나우 왕정의 퇴폐를 묘사하는 작가로 낙인 찍혔으며 모든 작품에서 당시 세기말 빈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어 풍속 묘사가로, 그의 문학은 오락문학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슈니츨러의 문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절하는 무대를 사회비판의 장으로 바꾸어놓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사회변혁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는 인식 때문이다. 1960년이 지나서야 슈니츨러는 사회전통의 압박, 소외, 고독, 자유와 헌신, 거짓과 실제에 대한 갈등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작가로 평가되었으며 체호프처럼 위대한 인간묘사가의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1914년까지 슈니츨러는 오토 브람(Otto Brahm)의 연출로 빈 부르크테아터뿐만 아니라 베를린극장에서도 가장 많이 상연된 희곡작가에 속한다. 슈니츨러는 1931년 사망할 때까지 멸망한 사회의 연대기 작가로 평가받았는데 이는 그가 뒤늦게 단편소설 쪽으로 방향을 돌렸기 때문이다. 1960년경에야 비로소 극장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아들 하인리히 슈니츨러의 도움으로 슈니츨러의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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