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2년에 공연된 ‘털 복승이 원숭이‘는 얼핏 보기엔 노사 간의 투쟁을 풍자한 사회극처럼 보인다. 주인공 양크는 자본가에 대해 반항하고 투쟁하는 무산계급의 대표자로 볼 수 있고 롱의 발언은 분명히 공산당원의 발언이며 더욱이 부르주아 계급의 딸인 밀드렛에 의해 북돋아진 자본가 계급에의 반항도 얼핏 계급의식의 각성인 것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극에서 “고대 및 현대생활의 한 희극”이라는 부제를 단 작가의 의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오닐 자신의 말을 들어 보자.
이 연극의 주재는 과거나 현재는 물론 미래에 있어서도 연극에서의 유일한 주제인 인간 자체와 자기의 운명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라 할 수 있다. 옛날에는 신과의 투쟁이었는데 현재는 인간 자신, 자신의 과거와의 투쟁. 자기가 있어야 할 장소를 얻기 위한 투쟁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잃고 지상에서도 천국에서도 이것을 발견할 수 없고 전진할 수도 없으며 퇴보하려고 한다. 이것이 즉 고릴라와의 악수이다.
이와 같은 작가의 말에 의해 이 연극이 단순한 사회극이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인 의미를 갖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 작품보다 앞선 작품인 '지평선 너머‘ 나 '안나 크리스티’ 에서는 운명이란 것이 외부에서 인간에게 중압을 가하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황제 존스‘ 나 ’털 복숭이 원숭이‘에서는 내부에서부터 인간을 괴롭히는 절대 힘의 상징이 된다. 즉 주인공이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자기의 과거와 싸우고, 영혼이 안주할 땅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정신적 갈등이 이 작품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양크는 호화선의 화부로서 남들보다도 뛰어난 자기의 완력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자기의 힘에 의해서만이 이 배는 달릴 수 있으며 전 세계는 그것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어 왔다. 그는 현대사회의 복잡한 기구에 대해 조금도 아는 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화부들과 같이 자기의 생활 속에서 무상의 가치와 만족을 찾아내고 자기 예찬에다가 아무 모순이나 불안도 없이 정착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무능력한 자본가들을 비웃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런 녀석들한테 무슨 가치가 있어? 저 녀석들은 말이지 짐짝 같은 거라고. 도대체 누가 이 배를 움직이게 하는데? 우리들이잖아. 그렇다면 우리들 이 쓸모 있는 거 아냐? 우리들이 쓸모 있고 저것들은 쓸모없는 변변찮은 것들이라고. 그것뿐야… 기관실이 지옥이라 말하는 거야? 당연하지. 지옥에서는 남자가 아니면 일할 수 없거든… 그 녀석들을 움직이게 하는 건 나야! 정말이지 내가 없는 날에는 모든 것이 멈추게 돼.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게 되어 버린다고. 어때? 알았어?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웅웅하는 소리도, 연기도, 모든 엔진도 다 멈추지. 모든 것이 없어져 버리는 거야! 내가 말하는 건 그거야… 우리들이 모든 기구를 움직이게 하고 있어. 스스로 한 몫 한다고 생각하는 부자 녀석 따위는 아무 가치도 없어! 놈들은 시시해. 그러나 우린, 우리들은 움직이고 있어. 우리들이 바닥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 은 우리들의 힘에 의존하고 있는 거야…"

그러나 기관실에서 일하는 양크의 짐승 같은 모습을 본이 선박회사 사장의 딸 밀드렛 부터 '역겨운 짐승'으로 매도된 양크는 이제까지의 자신이 갑자기 흔들려서 자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한 채 털 복숭이 원숭이로서의 자기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종래의 생활에 정착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에 대해 새로운 반감을 품은 그는 안주할 땅을 찾아 배에서 내린다. 우선 뉴욕 5번가로 가서 교회에서 돌아오는 부자들에게 폭행을 가함으로써 투옥되고 만다. 출옥 후 세계 산업 노동자 조합을 찾지만 여기서도 폭력주의 때문에 배척당한다. 결국 그는 동물원 우리 속에 갇혀 있는 고릴 라에게서 자기의 유일한 동료상올 발견한다. 그는 고릴라를 향해 오히려 네가 나보다 행복하다, 너는 생각도 말도 할 수 없으니까 환경이나 자연이나 운명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데 반해 난 어설프게 사고력이라는 힘을 갖고 있어서 더욱 괴로워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난 이 세상에 있지도 않고 천국에 있는 것도 아니야, 알겠어? 난 그 중간에 있어서 양쪽을 떼어놓으려 하면 어느 쪽에서든 호되게 얻어터지게 되는 꼴이지. 아마 이것이 지옥이란 곳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넌 제일 바닥에 있어. 어쨌든 있을 수 있는 곳에 있단 말야! 정말이야! 제대로 있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너 하나야. 년 행복한 거야!" 라고 말하며 둘이서 완력을 떨쳐 모든 것을 파괴하여 죽음의 꽃을 피우자고 소리 지르고 고릴라에게 맹우로서의 악수를 구하다가 고릴라에 의해 목 졸려 죽음 당하는 것이다. 이 비참한 종말은 정말로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비극은 원시적인 고대에서부터 문명개화한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사회에 있어서도 항상 반복되는 인간 비극이다. (작가가 이 연극에 도리어 '희극'이라는 부제를 붙인 점에서 그의 아이러니가 돋보인 다. 비극과 관점을 달리하면 희극으로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생을 「기묘한 막간희극』으로 비유한 아이러니와 통하는 것일 거다) 즉 사고력을 부여받고서도 정확히 사추할 수 없고 자기반성을 하면서도 올바른 자기인식을 할 수 없으며 남을 경멸하면서도 자기 능력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게다가 자부심을 버릴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 비극, 바꾸어 말하면, 운명 또는 자연과의 조화를 상실하고 정신적 안주를 할 땅을 찾아 방황하는 인간의 비극이다. 그렇기 때문에 양크는 개성을 가진 한 사람의 노동자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상징하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자연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지상에서도 천국에서도 안주할 땅을 찾아낼 수 없는 인간과 자연과의 대립을 노동자 인 화부와 자본가의 대립이라는 미국적 현실 속에서 상징화한 작품이 바로 이 '털 복숭이 원숭이‘인 것이다. 극의 기법 면에서 볼 때, 오닐은 이 작품이 ‘황제 존스’와 같이 표현주의적 작품으로 간주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특히 이 작품이 독일 표현파의 영향을 받아 쓰여 진 것이라는 비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내가 처음 본 표현파의 연극은 1922년 뉴욕에서 상연된 카이저의 ‘아침부터 밤까지’ 로서 그것은 ‘황제 존스’ 나 '털 복숭이 원숭이‘ 가 쓰여 진 뒤의 일이다. 나는 ’털 복숭이 원숭이‘ 를 쓰기 전에 ’아침부터 밤까지‘를 읽은 적이 있으나 그 때는 ’털 복숭이 원숭이‘ 의 구상이 모두 완성된 때였다. 요는 내가 표현주의를 알기 훨씬 전에 쓰여진 ’황제 존스‘의 중간에 ’털 복숭이 원숭이‘가 태어 난 것이다… 실제로 나는 ’아침부터 밤까지‘를 대단하다고 느끼진 않았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것에서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
이와 같이 오닐 자신은 독일에서 일어난 표현주의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표현주의를, 하나의 사상을 외부로부터 정적으로 묘사한 사실주의에 대해, 그 사람 내부에 잠재된 것을 작가의 주관에 비추어 표현하고 개성보다도 유형을 묘사하려는 방식으로 규정하게 된다면 이 작품은 내용이나 형식 양쪽에 있어서 전형 적인 표현주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유의해야 할 것은 이 극이 황제 존스‘와 더불어 오닐의 최초 표현주의 작품인 동시에 또 미국 연극 사상 최초의 표현주의적 작품이라는 점에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갖는 것이다.

연출에 대해 작가가 “이 장면 및 이 연극의 다른 모든 장면의 취급도 결코 사실적이어서는 안 된다.” 라고 지정하고 있는 점에 - 즉 연출은 상징적이어야만 한다. -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이 극이 어느 특정한 사회에 있어서의 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 생활의 비극을 상징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문제는 주인공의 감정적 격렬함과 미국 생활로부터의 급작스런 소외에 대해 충분한 설명도 동기부여도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관객이 이 연극을 완전히 감상하지 못하자 오닐은 “양크는 실제 당신들 자신이며 또 내 자신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라고 불평을 하고 있다. 오닐에게 양크는 진정으로 '나 자신'이었다. 그는 영원한 아웃사이더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토박이 미국인에게 양크의 소원감의 난폭성은 지나친 것 같았다. 정의상으로는 양크라는 이름의 인물은 부분적으로 미국 생활에 속해 있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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