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렌마트는 『물리학자들』이라는 가공의 집단 속에서 그 가운데 두 명이 양분된 동서진영의 첩보원임을 은연 중 시사함으로서, 50년대 이후 시작된 냉전 시대의 상황을 극중 구조로 삽입시켰다. 그러나 그는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 논쟁 같은 것은 펼치지도 않았을 뿐더러, 중립국에 사는 희극작가답게, 그 어느 편을 드는 입장도 교묘히 피했다.
키파르트의 『오펜하이머 사건에서』는 역시 핵물리학자를 다루고 있지만. 냉전시대의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친 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피부에 와 닿으며 시사적이다. 이는 물론 역사적으로 실재한 기록이라는 사실성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그렇긴 해도 원래의 자료를 압축 분류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품은 의도와 취사선택의 솜씨도 크게 뒷받침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이 극은 1964년 1월에 TV극으로 방영되었고. 같은 해 10월 베를린과 뮌헨에서 무대에 올려졌다. 1964년이라면 오펜하이머 사건이 있은 지 10년. 또 주인공 오펜하이머가 복권된 이듬해이다. 그런데 왜 이 극이 사건 후 10년이나 된 뒤. 그것도 사건 무대였던 미국이 아닌 서독에서 하필 나오게 되었을까? 키파르트가 이 작품을 다룰 때의 서독 정치상황은 이에 대한 답을 쉽게 준다. 때는 아데나워가 50년에 펼쳤던 뿌리 깊은 냉전논리를 극복하지 못한 시기. 갓 동독에서 건너온 작가인 키파르트가 아직도 짓누르고 있는 서독의 군국 적 반공주의를 체험하면서. 냉전논리의 뿌리인 매카시즘을 겨냥케 된 심리과정은 쉽게 수긍이 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오펜하이머 사건’ 을 낳은 매카시즘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해방 후 우리의 역사. 아직도 극복해야 할 현실과도 무관치 않을 뿐더러 지금의 주제와도 여러 갈래 얽혀 있으므로. 여기서 잠시 그 실상을 개관하여 보기로 하자.

2차 대전이 끝난 후 1947년. 미국의 정가는 근 20년 만에 보수파 공화당의 승리로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공화당 출신 트루먼 대통령은. 불과 2년 전까지도 히틀러와 히로히토에게 겨누었던 공격의 화살을 스탈린에게 돌리면서 ''공산주의 타도!”를 정치구호 제 1성으로 삼았다. 그 후 55년에 이르기까지 반 미행위자의 색출작업이 극성스럽게 벌어졌다. 미국 국기에의 충정 여부를 선별하는 이른바 충정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의장으로 위스콘신 출신 상원의 원 매카시가 앉았다. 이 위원회가 만든 용공 여부 선별 필터에는 250만 명의 정부관리, 3백만 명의 군인. 3백만 명의 국방 관계 요원이 거쳐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과 연루된 가족까지 합산한다면, 2천만이 넘는 미국시민이 언제라도 이 필터에 걸려들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가히 그 긴장과 공포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 다. 속칭 '마녀사냥‘으로 불려 진 이 히스테릭한 조사 절차의 첫 케이스로는 아이슬러 가문의 형제들이 걸려들어 세계적 주곡을 받았다. 그 가족의 일원으로 훗날 브레히트와 『갈릴레이 생애』 세 번째 판 무대작업을 한 작곡가 H. 아이슬러의 진술 내용은. 그때 상황을 십분 유추하게 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위원회가 나 하나의 개인을 박해함으로써 미국 내의 다른 많은 예술가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 이 위원회는 진보적으로, 사회적으로 생각하는 예술가를 겨누어 출정하여 그들의 예술작업을 히스테릭한 정치적 심사 대상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이건 헌법에도 위배되는 일입니다. (…) 이런 짓거리는 이미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자행했던 것이지요.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 이 위원회도 그럴 겁니다. 수많은 낯익은 이름들 (토마스 만, 하인리히 만 형제, C.채플린, A. 아인슈타인, 피카소. 마리스, 꼭도 등)이 H. 아이슬러를 변호하며 나섰다. 그러나 결국 토마스 만과 채플린도 1950년에 이 위원회의 수사 대상에 올라 스위스로 이주했다. 아이슬러에 대한 해결은 기술적인 추방'. 즉 '자발적인' 퇴거였다. 1948년 에 뉴욕을 떠나면서 아이슬러는 자신이 두 차례나 파시스트들에 의해 추방되었다고. 히틀러와 메카시즘을 동일시했다.

J. 로버트 오펜하이머
브레히트 역시 1947년 10월 30일에 이 위원회 앞에 서는 곤욕을 치웠다. 그 당시 신문 내용은 녹음으로 보존되어 있는데. 아이슬러는 브레히트가 위원회 측을 압도하는 진술을 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브레히트는 고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튿날로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 후 취리히에서 만난 몇몇 동료작가(C. 추크마이어. E. 케스트너, B. 베르겐그륀. M.프리쉬 등)와 더불어 냉전에 맞서는 지식인의 궐기를 호소하는 성명문을 기초했다.
또 다른 전쟁의 조짐이 세계 재건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미 평화와 전쟁의 선택이 아닌, 평화냐 몰락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 점을 인식 못하는 정치인들을 향해 우리는, 민중들은 평화를, 요구하고 있음을 결연히 고지하는 바입니다.
이 오펜하이머 사건은 이 '마녀사냥‘의 막바지에 터졌다. 공안위원회가 주재한 심리 절차는 1954년 4월 12일부터 한 달 동안 연인원 40명 이상의 증인을 동원하면서 비 공개리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5월에 그 기록이 여론에 공개되었다.
키파르트는 3천 매가 넘는 원 기록을 140매로 압축. 8개의 장면으로 정리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키파르트의 이 극은 우선. 당시 메카시즘의 실상을 조망하게 해 주는 점에서 대단한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 이상의 복합적 차원의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심리 대상의 특수성에 힘입어. 이데올로기에 얽힌 현대과학자들의 숙명적 문제점을 열어 보인 것이다. 따라서 이 극은 히로시마 이후 '그들의 성공이 곧 그들의 참패' 가 된 현대과학자들의 위상과 원죄의 상황 해부도라 할 수 있다.
오펜하이머의 고백처럼. 원자탄 이후 오늘날의 과학자들은 '분열증세' 를 앓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비록 그들의 지식이 순수한 학문적 열의에 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할지라도, 그 지식의 생산품이 이데올로기 수호자들의 수중에서 요리되고 있는 한, 그들은 생산자로서의 소외감을 벗어날 길이 없다. 그 소외감마저 없다면. '배반자의 위치에서 '바보'로 전락하는 택일이 있을 뿐이다. 키파르트의 극 중의 에반즈가 불길하게 예언했듯이 오펜하이머는 단지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작가: 하이나르 키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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